[정태화 칼럼] “여자 배구가 2회 연속 올림픽 출전권을 따낼 동안 도대체 남자 배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한국여자 배구대표팀이 2016년 5월 17일 일본 도쿄 메트로폴리탄 체육관에서 열린 리우올림픽 최종예선전에서 홈팀 일본을 3-1로 완파하자 배구인들은 희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 여세를 몰아 페루와 카자흐스탄까지 연파하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 이어 2회 연속 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내자 이번에는 남자배구에 대한 우려가 뒤를 이었다.“ 최근 배구인들은 배구가 농구보다 인기가 더 높고 팬들도 많아졌다고 으썩해 하지만 남자 배구를 보면 지금의 인기는 사상누각(沙上樓閣)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빨리 강만수처럼 아시아를 넘어 세계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토종 거포들을 키워야 합니다.” 어느 원로 배구인의 푸념이자 따끔한 충고다. 토종 거포 강만수. 은퇴한 지 이십 수년이 지나 뇌리에서 사라졌을 법한 강만수의 이름이 지금도 팬들이나 원로 배구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것은 그의 존재가치가 지금까지 빛나고 있다는 반증이다. ‘집안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家貧思賢妻 國難思良相)는 옛말처럼 2004년 아테네올림픽부터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고 침체에 빠져있는 남자배구에 ‘제2, 제3의 강만수’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찌 이들 뿐이랴!

가공할 위력의 스파이크
그는 마치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처럼 코트를 누비다가도 코트를 벗어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순한 양으로 변한다. 두주불사인 다른 선수들과 달리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같이 어울려도 묻는 말에만 간단하게 대답할 뿐, 그냥 싱긋이 웃는 게 전부다. 195㎝의 큰 키, 일반인의 두 배에 가까운 큰 손이 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뿐이지 겉모습만 보아서는 그가 한때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명성을 떨친 스타플레이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강만수.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거포다. 아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 세계에서도 그만한 거포는 찾기가 힘들다. 언제나 그의 이름 앞에는 아시아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직까지 그와 겨눌만한 거포가 없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강만수의 공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야! 만수야”하고 부르는 세터 김호철(전 현대캐피탈 감독)의 볼 배급을 받아 높은 점프에서 날리는 육중한 스파이크는 마치 굉음을 내듯 코트에 내려 꽂혔다. 순간적으로 볼이 찌그러진 듯 보였고 천정이 낮다고 할 정도로 높이 솟아올랐다. 멋모르고 블로킹을 한다고 손을 갖다 대다가는 손가락 마디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 바람에 강만수가 공격을 하면 블로커들은 요령껏 살짜기 손을 비틀곤 했다. 일본 언론에서 강만수의 스파이크를 두고 천둥소리가 들린다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그 가공할 위력을 쉽게 짐작할 만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이 끝난 뒤인 것 같습니다. 홍콩에서 유럽 팀과 친선경기가 있었어요. 다른 선수들은 장신의 유럽 팀에 통하지가 않아요. 스파이크를 날리면 블로킹으로 막아내고 페인팅이나 연타는 모두 수비에 걸려요. 그런데 유일하게 강만수 스파이크는 유럽 선수들이 아예 수비조차 할 생각을 않더라구요. 그러다보니 강만수 혼자 공격을 하는 형편이 되어 버렸죠. 3세트 지나고 나니 체력이 떨어져 점프도 제대로 못해요.” 당시 경기를 취재한 한 원로기자의 회고다.

본격적인 배구 시작은 고등학교에서
강만수는 1955년 경남 하동에서 4남4녀, 8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당시 우리나라가 그렇듯이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하던 때였지만 농사를 지은 덕택에 그의 집안은 넉넉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배를 곪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키가 더 큰 168㎝나 됐다. 어머니를 많이 닮은 강만수는 하동초등학교 또래 학년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키가 컸지만 굳이 처음부터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품지는 않았다. 그러던 그가 운동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특별활동시간 때였다. 키가 큰데다 손도 커 볼을 잡고 던지는데 소질이 있어 비교적 작은 볼인 핸드볼을 하면서 흥미를 붙인 것. 매일 운동을 한다고 늦게 집에 들어갔으나 부모님은 걱정을 하지 않았다. 가족이 8남매나 되는데다 학교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선수를 한답시고 말썽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드볼 선수와는 인연이 없었다. 핸드볼 팀이 없는 하동중학교에 진학을 한 것이다. 하동중학교에는 축구팀과 배구팀이 있었는데 축구팀이 인기가 많아 축구를 시작했다. 여기서는 큰 키와 큰 손이 오히려 손해가 됐다. 공격수를 하고 싶었는데 키가 크고 손이 크다며 골키퍼를 시킨 것이다.“ 하루 종일 공을 받은 뒤 땅바닥에 구르는 훈련만 하는데 재미도 없고 몇 번 하니까 하늘이 노래지면서 어지럽고 온몸은 매일 흙투성이고…. 그래도 할 수 없이 했지만 너무 힘들고 나중에는 죽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어요.” 결국 축구마저 그만두고 3학년 때 뒤늦게 배구로 바꿨다. 우선 배구를 하니 힘이 들지 않았다. 볼을 만질 수 있으니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하자 쉽지가 않았다.

배구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이왕 배구를 시작했으니 배구 명문고인 서울의 대신고나 인창고에 가고 싶어 이리저리 선배들을 찾아다니고 있을 즈음 고향 선배인 최재학이 찾아와 부산 성지공고(현 성지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을 권했다. 대신이나 인창으로 가면 선배들에게 엄청나게 맞아야 한다는 엄포(?)를 곁들이며. 한편으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성지공고가 대신, 인창에 이어 전국 3위권으로 경남에서는 최고라는 점이 마음에 끌려 진학을 결심한다. “돌이켜보면 성지공고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배구를 시작한 셈입니다. 최용진 선생의 지도와 선배들과 함께 한 엄한 훈련 덕분에 기초가 탄탄히 다져졌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 몇 번이나 운동을 그만 두려고 짐을 쌓다가 풀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중학교 졸업도 하기 전인 12월에 성지공고 합숙소에 들어갔다. 자동 밥솥이나 세탁기가 있을 리 없었다. 모두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한 겨울에 식사당번에 선배들 빨래, 청소를 도맡아 해 손이 터서 피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리시브가 흔들리거나 선배들이 때리기 좋은 위치로 토스하지 않으면 뒤에 가서 맞고 다시 훈련을 했다. 아무도 모르게 엄청 울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일취월장(日就月將),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은 강만수에게 그대로 적용됐다. 그만큼 고생을 한 덕택에 1학년 때부터 대회에 나갔고 2학년이 되어서는 주전 왼쪽 공격수를 꿰찼다. 183㎝인 키는 1년 새 0㎝나 자라 193㎝나 됐다. 주머니 속에 든 뾰족한 송곳인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나 할까? 1971년 서울서 열린 제52회 전국체전은 그를 지방무대에서 전국무대로 활짝 날아오르게 한 계기가 됐다. 이 때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는 이해 12월 30일 최연소 국가대표 상비 2군으로 발탁됐다. 같은 고등학생으로 이종원, 문광일(이상 인창고) 정강섭, 석경홍(이상 남산공전), 강대성(경북사대부고)이 있었으나 강만수는 이 가운데 17살로 가장 어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이어 그는 해가 바뀐 1972년 7월 3일 뮌헨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전을 위한 국가대표팀에 포함돼 구기 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가 됐다. 반드시 북한을 이겨야만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소위 ‘상띠에 결전’을 앞두고서였다. 이규소 감독에 최종옥, 이용관, 정동기, 김충한, 김귀환, 진준택, 이선구, 이춘표, 박기원, 이인, 김건봉 등 12명이었다. 고등학생으로 상비 2군에 발탁됐던 6명 가운데는 강만수만 유일하게 포함됐다. “당시 북한과의 경기는 전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북한에 패하면 모두 한강에 빠져 죽어야 된다는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나는 제일 막내여서 게임에는 뛰지 못했지만 그 분위기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북한과 경기를 하면서 우리는 수시로 ‘너희들 지면 모두 아오지 탄광에 가야지’하면서 심리전을 폈고 그러면 북한이 연거푸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패한다고 여겼던 북한에 승리한 뒤 서울에 돌아왔으면 엄청난 환영을 받았을 텐데 시간이 없어 곧바로 뮌헨으로 가고 말았지요.”

▲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농구스타 강현숙과 함께 한복을 입고 입장하는 강만수

최장수 국가대표, 남자배구 전성기 이끌어
강만수는 1972년 뮌헨올림픽을 시작으로 1984년 LA 올림픽까지 만 12년 동안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역대 최장수 국가대표였다. 그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는 동안 우리나라 남자 배구는 전성기였고 그가 소속된 팀은 항상 우승권에서 맴돌았다. 그만큼 그의 존재는 팀에 절대적이었다.그가 국가대표 주전 왼쪽 공격수로 나서기 시작한 1973년부터 국제대회 성적을 보면 이해 모스크바유니버시아드 3위를 시작으로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은메달, 1975년 제1회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 은메달,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6위, 1978년 로마세계선수권대회 4위에 이어 이해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마침내 대망의 금메달을 따낸다. 이어 1979년 멕시코 유니버시아드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이 가운데 1978년 로마세계선수권대회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출전한 1984년 LA 올림픽은 지금도 손에 잡힐 듯 그의 눈에 선하다. 로마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예선을 3전승으로 통과한 뒤 준결승리그에서 1974년 세계선수권 우승팀인 폴란드를 비롯해 체코, 루마니아 등을 잇달아 꺾고 가는 곳마다 ‘꼬레 돌풍’을 일으켰다. 손안에 쥐었던 메달은 강만수의 오른쪽 어깨 이상과 더불어 놓쳤지만 지금까지 한국배구의 신화로 전해내려 오고 있다. 동구권의 높은 블로킹 벽을 현란한 솜씨로 좌우로 흔든 단신 세터 김호철, 17살의 장윤창(당시 인창고 3년)이 세계적인 선수로 떠오른 것도 이 때였으며 강만수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연봉 10만달러(5천만 원)에 이탈리아 팀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국내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반면 1984년 LA 올림픽은 지금까지 가슴에 한(恨)으로 남아 있다.

한국은 예선전에서 일본에 2-0으로 앞서고 있다가 역전패를 당해 LA 올림픽 출전이 어려웠으나 소련과 동구권들의 불참으로 행운의 출전 기회를 잡았다.강만수를 비롯해 김호철, 문용관, 이종경, 강두태, 장윤창 등 역대 최강의 전력으로 올림픽에 나선 한국은 예선리그에서 튀니지를 3-0으로 누른 뒤 미국에 0-3으로 패했지만 브라질을 3-1, 아르헨티나를 3-2로 이겨 3승1패로 조 2위까지 나설 수 있는 준결승 진출을 눈앞에 두었다.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는 3연승의 미국과 2승1패의 브라질. 미국이 한 세트만 따도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미국이 후보 선수들을 기용하며 브라질에 0-3으로 져주는 바람에 5~8위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미국은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브라질을 3-0으로 가볍게 눌러 금메달을 따냈고 우리나라는 결국 5위에 그쳤다.“LA 올림픽이 끝나고 한참 뒤 일본에서 당시 미국팀 감독이었던 다크 빌을 만나 왜 브라질에 졌냐고 물었더니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더라구요. 만약 그때 우리가 올라갔다면 어느 팀과 붙어도 자신이 있었는데 미국이 져주기를 하는 바람에 올림픽 메달의 꿈이 날아가 버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일본과 아랍에서도 존재감 뽐내
강만수는 성지공고 졸업과 동시에 수도경비사령부에 들어가 한양대(1978년 졸업), 금성통신(1978년 2월~1980년 7월)을 거쳐 아랍에미레이트 알자지라 클럽(1980년~1982년)에서 활약했으며 1982년 현대자동차서비스 창단 멤버로 국내에 되돌아 왔다. 그 뒤 1984년 국가대표에서 물러나 일본 와세다 대학원에서 학업과 선수를 겸임하며 3년, 일본 도레이 배구단에서 4년 동안 더 선수생활을 했다. 1992년 현대자동차서비스 코치를 맡아 21년 동안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아랍과 일본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빛났다. 알자지라 클럽에서 리그 우승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등이 출전하는 걸프대회에서도 우승을 일궈냈다. 와세다 대학에서는 2부였던 팀을 1부로 끌어 올린 뒤 1985년에는 무려 33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어 와세다 대학 후원회장인 모리 요시로 교육상(전 수상, 현 2020년 도쿄올림픽 조직위원장)이 대대적인 우승 환영연을 베풀어 주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실업리그 2부인 도레이를 당시 일본체육대학 청강생이던 중국의 왕가위와 힘을 합쳐 1부인 니혼리그로 승격시켰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그가 경기를 하는 날에는 일본 여성 팬들이 줄을 이었고 호텔에는 꽃을 든 여성 팬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가운데 영화배우인 구로다 후쿠미는 가장 열렬한 팬 가운데 한명이었다. 1983년 일본에서 처음 만나 “한국에 이런 멋있는 남자가 있는 줄 몰랐다”며 이때부터 강만수의 팬이 된 구로다 후쿠미는 그 뒤 한국말을 배워 ‘서울의 달인’이라는 관광가이드북을 내는 등 스스로 ‘한국병이 걸렸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구로다 후쿠미는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홍보대사, 2013년 경기도 관광홍보대사를 맡는가 하면 한류전도사로 대한민국 수교훈장(흥인장), 한일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일본과 경기에서 블로커 2명을 뚫는 강스파이크를 때리는 강만수

꺼지지 않는 지도자의 꿈
강만수는 선수 시절 ‘우승 청부사’로, ‘아시아 최고의 거포’로 명성을 떨쳤지만 지도자로서 강만수는 달랐다. 청소년대표 감독으로, 실업팀 감독으로 우승도 맛보았지만 프로배구에서는 두 차례나 성적부진으로 중도하차를 당했다. 아마도 이 때문에 감독 복귀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그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로 돌아와 지도자로 맡은 첫 임무는 1992년 테헤란에서 열리는 제6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였다. 그는 세터 김경훈(인하대), 왼쪽 공격수 김상우(성균관대), 신진식(이리남성고), 오른쪽 공격수 김세진(한양대), 센터 김병선(성균관대), 신정섭(인창고) 등과 함께 어려움을 같이 풀어가는 편안한 관계의 ‘맏형 철학’으로 1~3회 우승에 이어 3년 만에 우승컵을 되찾아왔다. 이 해 겨울 현대자동차서비스 코치로 이인 감독과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된 그는 불과 1년 만에 감독으로 승격해 고려증권에 밀렸던 팀을 1994년 제11회 대통령배, 1995년 슈퍼리그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이 동안 1997년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되고도 선수 선발을 둘러싸고 협회와 갈등을 빚으면서 4개월 만에 중도하차하는 불운도 겪었다.

이와 함께 삼성화재에 밀려 네 차례 우승 문턱(1998년 슈퍼리그에서는 3위)에서 쓴잔을 들었고 2001년에는 결국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동안 배구판을 떠나 7년이 지난 2008년 대한배구협회 강화위원장으로 복귀하고 뒤이어 이듬해인 2009년 6월 프로배구 수원 kepco45(현 한국전력) 감독으로 부임해 날개를 펼 기회를 맞았으나 2009년 6위, 2010년 5위의 성적을 거둔 채 쓸쓸히 팀을 떠나야 했다. 그는 2013년 우리카드로 3번째 감독을 맡았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재창단한 우리카드를 맡아 첫해 4강까지 끌어 올렸으나 이듬해 팀 간판인 신영석을 팔아 운영자금으로 쓰면서 팀 매각 파동에 휩쓸리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꼴찌(7위)로 떨어지며 다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남자배구가 지금 위기입니다. 지나치게 외국인 선수들에게 의존하고 있어 제대로 된 공격수가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키가 큰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어 기본기만 잘 다듬으면 거포가 나올 수 있어요.”이순(耳順)을 갓 넘긴 강만수의 가슴에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지도자의 꿈이 배여 있다. 관중석이 아닌 코트에서 선수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는 ‘감독 강만수’를 다시 볼 날이 있을지 기대된다.

▲ 정태화 한국체육언론인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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