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건강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20대에 관리하여 30대를, 30대 관리로 40대를, 40대 관리로 50대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 이전, 이후 연령대도 마찬가지다. 결국, 현재의 내 몸을 관리함은 미래에 대비한 일종의 보장성 보험이다. 젊다 하여 쾌락과 안일을 추구하는 삶은 미래의 소중한 자산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행위에 다름없다. 7년 전에 술을 끊은 필자에게 지인들이 던지는 질문은 대개 비슷한데 그중 하나는 언제 다시 먹을 거냐는 거다. 지금 와서 무얼 먹겠느냐고 대답하고 그들의 표정을 살피면 실망의 빛이 역력하다. 사회적 동물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 같이 마시고 죽자고 함께 외치던 자의 변화와 그 지속이 마뜩잖은 걸까.

금주의 지속이 10년을 향해 달리자 많은 술벗들이 필자의 곁을 떠났다. 그렇다고 그들과 내가 오로지 술 때문에 만난 것은 아니다. 술이 인간관계의 매개가 되어 함께 누리던 즐거움이 사라지자 기호가 달라진 이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인데, 이로써 술과 인간관계의 개연성은 입증된 셈이다. 필자의 주위엔 단주 30년 차와 17년 차 선배(?)들이 계시다. 물론 세 사람이 같이 만난 적은 없으며 그럴 계획도 없다. 술 먹는 이들과 달리 우리는 만나도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늙수그레한 남자 셋이 만나 과일을 깎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다음에 식사를 기약하기는 하지만 헤어지면서 하는 인사말에 불과하다. 땅거미 깔린 후에 오로지 밥만을 먹기 위해 기를 쓰고 뭉치는 남성들은 그리 흔한 편이 아니다.

필자를 포함하여 절간의 스님처럼 살아가는 이 세 남자의 건강은 어떤 편일까. 금주, 금연하는 자들은 식이와 운동을 포함한 생활습관이 제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세 사람의 건강은 대체로 양호한 편인데, 지천명에 술을 끊고 현재 80인 최고령 금주자는 대부분의 술 친구들을 먼저 보냈다며 허허롭게 웃는다. 50대 중반의 17년 차 금주자는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다져진 단단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다. 병원, 그리고 의약품, 심지어 건강진단까지 거부하는 필자 역시 별 무리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사업하는 필자는 매월 내는 건강보험료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므로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인다는 자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태도는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면 벌금까지 부과하겠노라 으름장을 놓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은 건강하다. 이들에게 억지로 불편하고 불필요한 건강 검진을 받게 함으로써 질병 발견율을 높여 과잉진단(치료)을 조장하는 행위는 과연 바람직한가. 필자의 경우는 아프다면 갈 곳도, 먹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관리를 가일층 지속하는 힘이 된다. 직장인이라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건강검진이 있다고 들었지만 받지 않는 필자는 알 턱이 없다. 당연히 그 흔한 위 또는 대장 내시경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다. 고통스럽고 번거로운 대장내시경을 받았다 치자. 입으로 집어넣고 항문을 들쑤셔서 들여다본들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행여 용종이라 칭하는 폴립이라도 발견되면 그것을 떼어 낼 것인가. 아니다.

혹부리 영감도 살아가고 산속의 고목도 커다란 혹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간다. 항상성의 원리로 보자면 우리의 몸에 혹이 생길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암을 포함한 혹이라는 것이 그냥, 혹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일까. 또는 나 자신의 정신과 몸을 학대한 것에 대한 내 몸의 앙갚음일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종양은 나의 몸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취하는 많은 대응 방식 중 하나일 수 있다. 표면적 변화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증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지, 그것을 파괴하고 약화하는 쪽으로 우리가 대응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몸의 모든 증상을 바라보고 대응하는 기존의 방식을 변화시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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