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다이어트의 어원인 그리스어 디아이타는 “건강하게 균형 잡힌 영양”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는 삶을 의미한다. 식이 등 건강한 삶을 강조할 뿐, 벅찬 운동으로 살을 빼라는 의미는 담고 있지 않다. 제법 날래게 걸어 콧잔등에 땀이 맺힐 정도, 또는 옆 사람과 대화가 겨우 가능할 정도로 힘차게 걷는 한 시간 정도의 속보가 체지방을 덜어내는 가장 효율적 운동이다. 욕심을 내어 달려보는 것은 어떨까. 소모되는 열량이 걷기에 비해 상승함은 맞다. 하지만 강도가 높은 운동 즉, 무거운 것을 들거나 갑자기 달려나가는 상황을 우리의 몸이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한다는 게 문제다.

이 상황에서 대사가 느린 지방을 우리의 몸이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므로 고강도 운동은 속효성 에너지인 탄수화물을 동원하게 된다. 회사 출근에 쫓기는 듯한 빠르기의 걷기가 근육 속 에너지 발전소에서 산화되어 없어지는 지방의 특성을 가장 잘 공략하는 방법이지만 재미적 요소가 부족하고 홀로 하는 운동의 특성상 지속이 어렵다. 여타의 교통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 한 시간가량 애써 내 몸을 이동시킨 거리는 약 6km 정도다. 살 빼는 운동의 대명사처럼 된 걷기는 과연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과거 가장 보편적 이동수단인 걷기는 인류가 직립한 이래 변함없는 이동 가치를 제공했다.

유사 이래 바퀴를 만든 인류는 동력을 거는 법을 개발하고, 틀을 올린 후 그 위에 올라탔다. 빠르고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혁신적 대체 수단이 속속 등장함과 동시에 가장 보편적 이동수단이었던 걷기는 운동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는다.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유일하고 간편한 이동 수단이 운동으로 분류되며 그(걷는) 행위는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된다. 걷기의 부족과 음식의 풍요는 이루어진 시기가 비슷한데 그즈음부터 유사 이래 가장 무거운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제 걷기는 수렵, 채집 등의 포식 행위 목적이 아니라, 비만인들의 체중을 덜어내는 수단으로 재조명을 받게 된다.

크기는 커지고 형태는 둥근 신인류가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하는 상황이 되자 인간이 다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족보행을 결심하고 보니 옛날처럼 걸을 곳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에 인간은 한정된 공간에서 걷거나 달릴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내는데 이 기계는 억지로라도 걸어야 하는 많은 사람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다. 관상용으로 가둔 다람쥐에게 쳇바퀴라는 자비를 베푼 인간들은 이번엔 자신들 역시 한정된 공간에서 걷거나 뛸 수 있는 기계를 만든 것이다.

헬스클럽에 가면 규모가 웅장한 이 기계는 위엄을 뽐내는 장군들처럼 한구석에 줄지어 서 있는데 집에 소장한 이들은 가끔 아래층 사람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몸에 붙은 지방을 털어내기 위해 사람들은 열심히 그 위에서 가짜걸음을 재촉한다. 양발을 젓가락처럼 교차해가며 대지를 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을 그 위에서 흉내 낼 뿐이다. 기특하게도 이 기계는 보행 거리를 알려주지만, 실제 이동 거리는 제로다. 몇백 미터를 걷든, 다부지게 맘을 먹고 수십 킬로를 달리든, 항상 제 자리를 맴돌 뿐이다. 대지는 우리가 서거나 앉아서 하늘을 볼 기회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기계는 작동을 멈추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 위에서 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플라스틱과 합성 고무로 만든 가짜 땅이 자신을 향해 쉼 없이 달려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땅에 밀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걸음을 재촉한다. 걷는다고 다 같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육상 선수들이 이 기계를 이용하지 않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지를 박차고 능동적으로 달리거나 걷는 것에 비해 가짜 도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것은 사용하는 근육의 종류가 훨씬 다르기 때문이다. 헬스클럽에서 걷는 시간에 밖으로 나갈 순 없을까. 돈이 들지 않는 진짜 걷기를 하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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