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테마토크] 탄성이 나올 따름이다. 드라마가 이렇게 진화한다면 영화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MBC 새 수목드라마 ‘W’(송재정 극본, 정대윤 연출)다. 강철(이종석, 30)은 2004 아테네 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따지만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중 부모와 두 동생 등 일가족이 모두 괴한에게 총살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범행현장의 지척에서 그가 올림픽에서 사용했던 권총이 발견돼 그는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처음엔 사형을 선고받지만 대법원까지 간 끝에 증거부족으로 풀려난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강물에 뛰어들려는 순간 복수를 결심하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수사전문 방송사 채널W 등을 거느린 재벌로 성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괴한에게 당해 생명이 경각에 달한다.

인터넷에 인기리에 연재 중인 오성무(김의성) 작가의 웹툰 ‘W’의 지금까지 진행된 스토리다. 명세병원 흉부외과 레지던트 2년차 오연주(한효주, 30)는 성무의 무남독녀다. 담당교수인 박민수(허정도) 전문의에게 매번 무능하다는 핀잔을 듣고 무기력하게 살던 중 민수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에 들어선 그녀는 깜짝 놀란다. 민수가 ‘W’의 열렬한 팬이었던 것. 그는 왜 성무의 딸인 사실을 밝히지 않았냐며 강철의 가족을 죽인 진범을 알아내주면 흉부수술실에 들여보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성무의 작업실로 전화를 건 연주는 아버지가 어젯밤 돌연 사라졌다는 문하생의 말을 듣고 단숨에 작업실로 달려간다. 왠지 작업실 분위기는 으스스하고 컴퓨터 화면 속의 아버지가 그리다 만 강철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그림이 음산함을 더해준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던 그녀는 순간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당황한 속에서도 응급조치로 강철을 살린다. 그렇게 연주는 자신이 사는 세계와 강철이 사는 세계를 오가는 과정에서 강철을 두 번이나 구하고, 성무가 이런 두 개의 공간이 공존함을 벌써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강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강철을 죽이려는 성무, 그럴 때마다 강철을 구하는 연주, 그리고 성무의 붓과 달리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생존하는 강철. 이 세 사람과 강철의 가족을 죽인 그 누군가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사연과 심오한 세계관들이 단 2회 만에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동시간대 최강자 KBS2 ‘함부로 애틋하게’의 시청률의 턱밑까지 추격하고 나섰다. 이런 추세라면 역전이 가시권이다.

남녀주인공인 이종석과 한효주의 매력과 그들이 맡은 캐릭터의 강점이 ‘함부로 애틋하게’의 김우빈과 배수지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부족함이 없다. 그건 이런 설정을 만들어낸 작가의 상상력과 이를 적절하게 카메라에 담아내 갖가지 후반작업으로 완성한 연출자의 능력이 조화를 이룬 덕이다.

할리우드 영화 ‘론머맨’(브렛 리어너드 감독, 1992)은 한 천재 과학자가 머리가 모자란 잔디 깎기 인부(론머맨)의 지능을 발달시키지만 그가 스스로 컴퓨터에 들어가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의 화신이 된다는 걸 기둥줄거리로 한다. 일찍부터 할리우드 작가들은 우리가 사는 공간 외의 또 다른 세계가 공존한다는 상상력을 가동시켰다. 후안 솔라나스 감독의 ‘업사이드 다운’(2012)은 위아래가 거꾸로 상반된 두 행성이 태양을 따라 공전하는, 정반대의 중력이 존재하는 두 세계가 공존한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W’는 ‘만찢남’에서 출발한 듯하다. 강철이 바로 그렇다. 만화를 찢고 나온 듯 잘생긴 데다 돈까지 많은 이 젊은 사업가를 연주가 섹시하다며 이상형으로 손꼽자 이에 민수가 전적으로 동의하듯 뭇 여성들의 우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 만화가 프레임 안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엄연히 또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면? 얘기는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치기에 딱 좋다. 드라마는 시작부터 강철을 중심으로 한 그의 고교동창이자 현 비서인 윤소희(정유진)와 연주의 삼각관계 구도가 형성되며 흔한 멜로물의 구조를 보이긴 하지만 절대 단순한 장르가 아니다. 판타지 멜로를 축으로 미스터리 스릴러와 거창한 철학적 철골로 단단한 뼈대를 갖추고 있다.

연주의 엄마 길수선(남기애)은 무능한 만화가 남편 성무 때문에 생활비를 책임지느라 안 해본 일이 없다. 한이 맺힌 그녀는 연주를 간신히 의대에 진학시키자마자 성무와 이혼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혼 후 성무는 승승장구하는 인기 작가가 돼 현재 수십억 원의 인세를 받는 갑부가 됐다. 이에 그녀는 이혼을 후회하는 천박한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성무는 자신의 출세의 정점을 찍게 해준 ‘W’의 연재가 지겨워 이제 끝을 맺으려 한다. 그 종점은 강철의 죽음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또 다른 세계의 실존인물이었던 것. 성무가 음모를 꾸미면 꾸밀수록 강철은 더욱 강하게 되살아나는 의지를 보인다.

연주는 성무에게 묻는다. ‘왜 강철을 죽이려하냐’고. 그러자 성무는 ‘나는 신이다. 내가 창조한 세계를 없애고, 내가 만든 인물을 이제 끝내려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일갈한다. 이 부녀간의 대화 속엔 꽤 묵직한 시사문제 혹은 철학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며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려든다. 사람의 편의를 위해 미필적 고의로 동물을 멸종시키는가하면 자연을 크게 훼손하면서도 죄책감 따윈 못 느낀다. 인류에게 치명적인 포식동물부터 농작물을 망치는 초식동물까지 사람의 생활터전으로 내려오는 것은 사람이 그들의 서식지를 파괴해서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 그들의 퇴치 혹은 살생에 혈안이 된다.

시사적으론 국가의 대표부터 유력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까지 겨냥했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성무는 일개 웹툰작가가 아니라 수많은 대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지도자급 인사다.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 대중이 웃고 울 수 있으며 때론 패닉상태에 빠뜨릴 수도 있다. 단지 지겹다는 이유로 강철을 죽이려는 게 바로 그렇다. 연주는 “모든 팬들이 강철이 진범을 잡고 행복하게 사는 해피엔딩을 바라는데 왜 그를 죽이려 하냐”며 생각을 바꿔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성무는 오피니언리더의 힘을 지닌 작가로서의 책임감보단 지극히 개인적인 피로감을 이유로 대중을 깊은 절망과 무기력함에 빠뜨리려 한다.

10여 년 전 검사 한철호(박원상)는 존속살해 혐의로 법정에 선 강철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그런 선고를 이끌어낸 바 있다. 일찍이 정계진출을 꿈꿨던 그의 눈에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오로지 여론조작으로 자신의 지명도와 투명한 이미지를 높이는 게 목적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집권당의 차기 대통령선거 후보로 출셋길을 내달려왔다. 굳이 영화 ‘베테랑’이나 ‘검사외전’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기시감을 주는 인물이다.

‘장자’의 ‘제물 편’에 있는 ‘호접몽’을 통해 장자는 제자(세상사람들)에게 세상만물을 이분법적 구조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설파했다. 노자는 “도(道)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고, 따라서 자연(自然)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은 어떤 것도 간섭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위(無爲)하다”며 “어떤 것에 간섭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무위자연을 가르쳤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입각해 물심평행론을 주창한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나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을 허상으로, 물질적인 것을 매우 중요한 현실로 인식하지만 두 가지는 다른 게 아니라 각자 공존하는 평등한 세계로 본 그다.

사람들은 자신의 망막에 맺힌 상을 다시 되돌려 인식한 대뇌의 지극히 국지적인 판단만 믿으려한다. 하지만 대뇌를 비롯해 소뇌 및 뇌줄기 등은 그런 단순한 현실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현재도 인공뇌는 없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고 바둑 외의 모든 지적 기능에서 인간을 앞설 순 없다. 중요한 점은 알파고는 스스로 생겨난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

그건 반대로 우리가 오감에 의해 인지하는 ‘현실’만 ‘진짜’가 아니라는 철학이다. 육감(Sixth sense)이란 단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분신을 뜻하는 ‘도플갱어’는 동명의 복수의 영화에서 다뤘는데 리롄제(이연걸) 주연의 영화 ‘더 원’(2001)은 각 우주와 공간을 누비며 자신의 도플갱어를 죽임으로써 그 능력을 이어받아 최강자가 되려는 인물을 그렸다. 인간의 오만과 편견은 ‘만물의 영장’과 지구라는 행성의 우월함이란 인식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인류를 폐망으로 이끌고 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드라마가 이런 심오한 철학을 담은 적이 있을까? ‘W’는 명불허전의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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