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지난 호 글을 읽고 누군가 질문을 해왔다. 시외버스 의자 등받이에 진짜 재떨이가 붙어 있었느냐고 말이다. 한 술 더 떠 버스 안에서 녹음기 틀고 음악을 들으며 술까지 마셨다 하니 그는 할 말을 잊는다. 세월의 흐름은 허용이 불허가, 제지 사항이 장려되기도 한다. 지금 같으면 신고 대상이지만 대낮에 웃통을 벗고 다니던 시절이 까마득한 옛일이 아니다. 흡연이 보편적이던 시절의 재떨이는 식탁이나 책상, 또는 방구석 한 편을 늘 차지했다.

특히 묵직한 크리스털 재떨이는 담배만큼 위험한 흉기였다. 다툼이 발생 시 재떨이의 공중부양은 흔한 일이었는데 요즘은 구경조차 힘들다. 육각형 통성냥 또한 기성세대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로 인한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여러 폐해에도 불구하고 흡연을 장려한 시절도 있었다. 열 살도 안 되는 어린이가 곰방대를 피워 문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약으로 효능이 있다 하여 온 가족이 피워 댔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괜한 게 아니다.

담배의 기원은 다양하다. 특히 아메리카 인디언은 흡연을 신과 교감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연기를 피워 하늘로 오르게 하면 신을 만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생각이 아예 틀린 건 아닌듯싶다. 흡연을 많이 할수록 하늘로 올라갈 가능성은 커지니 말이다. 하늘로 빨리 오르고 싶은 이 의식을 전 세계에서 11억 명이 진행 중이다. 물론 그중의 절반 이상은 그 의식을 멈추고 싶어한다.

필자가 생각건대 금연과 사업은 비슷한 점이 있다. 무엇인가 의존하면 실패한다는 거다. 심지어 짐을 싸들고 금연 캠프를 가는 이들도 있는데 문제는 캠프 기간이 아니라 집에 돌아온 그 이후다. 금연보조제 중 거래 규모가 담배만큼 커진 전자 담배에 얽힌 해프닝을 소개해보자. 어느 집 사위가 장인 앞에서 전자 담배를 피워 물었다고 한다. 물론 담배는 아니지만, 행위 자체를 보면 사위가 장인 앞에서 흡연하는 꼴이다. 당황한 장인에게 그 사위 왈 “아버님! 이건 담배 아닙니다”. 주먹이 상대 얼굴에서 멈추면 치지 않았으니 괜찮은 걸까. 나쁜 것과 유사한 행위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

전자담배로 낭패를 본 사례는 또 있다. 필자의 지인은 전자 담배를 몇 년째 피우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금연 장소에선 전자 담배를, 흡연 장소에선 진짜(?) 담배를 피우는 거다. 상황에 따라 원하는 대로 흡연이 가능한 선택의 폭만 넓어졌으니 혹 떼려다 되려 혹 붙인 경우다. 기호품에 투자하는 비용은 두 배로 많아지고, 건강은 두 배로 나빠진 사례라 볼 수 있다.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 주위에 나타나면 필자는 그에게 넌지시 제안을 한다. 금 한 돈을 금연 선물로 줄테니 만약 실패할 경우에 내게 두 돈을 돌려 주겠냐고 말이다. 대부분 담배를 얼마나 참으면 금을 안 돌려줘도 되는지 물어본다. 필자가 평생이라고 답하면 얼굴이 어두워진 그들은 선뜻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외 업무가 잦은 필자는 면세점에서 각 나라의 담배를 사곤 한다. 그것을 주위의 끽연자들에게 한 갑씩 돌리는데 피우라고 주는 게 아니다. 금연 결심을 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내가 준 담배를 피우고 흡연 인생을 끝내라는 것이다. 대부분 알았다며 받지만, 금연 결심이 서지 않으므로 뜯지 못하고 보관한다 한다. 몇 달, 몇 년 금연에 성공한 후 다시 담배를 시작한 사람을 보면 21년째 금연하는 필자로서는 마치 나의 일인 양 안타깝다.

결심 앞에 평생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건을 붙이거나 무엇을 전제로 해선 안 된다. 그것은 스스로 빠져나갈 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안 피우고 안 마시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그 흐른 세월이 아까워 못 피우고 못 마시게 된다. 금연에 대한 글을 마치며 필자의 담배를 받은 많은 분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이제 제가 준 담배를 뜯으시죠?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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