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 포스터

[미디어파인=김주혁 소장의 가족남녀M&B] 섬마을 주민들이 여교사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처음 거론된 대책은 도서벽지에 여교사 발령을 자제한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가해자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피해자에게 있는 것처럼 피해 여성에게 책임을 돌리는 편견이 작용했다.

학교전담경찰관이 선도해야 할 여고생과 성관계를 맺어 파문을 일으켰을 때 한 국회의원은 “잘 생긴 경찰관을 배치할 때부터 예견됐던 일”이라고 말해 도마에 올랐다. 역시 뿌리깊은 편견의 산물이다.

이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 그런 사실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12명의 성난 사람들’. 살인사건과 관련해 인간이 가진 편견의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국의 한 법정. 스페인계 18세 소년의 직계존속 살인 의혹 사건을 다루는 이 재판은 증언과 법률 해석 등 청문절차를 마치고 이제 최종 평결을 남겨두고 있다. 유죄든 무죄든 만장일치가 돼야 한다. 한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피의자 소년은 친아버지의 가슴을 칼로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소년은 가난하게 태어나 9살 때 엄마가 숨지고, 아버지가 위조범으로 수감되자 빈민가 고아원에서 생활했다. 차량 절도 등 전과 5범이다.

▲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 스틸 이미지

목격자와 증인들은 이 ‘불량’ 소년이 범인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말한다.

소년의 집 맞은편 기찻길 건너 집에 사는 45세 여자는 밤늦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다 창밖을 보던 중 피의자 소년이 아버지를 찌르는 걸 봤다고 증언했다. 그 때 전철이 지나갔으나 승객이 거의 없어서 볼 수 있었다는 것.

살인사건이 일어난 소년의 집 아래층에 사는 70대 노인은 밤 12시 10분쯤 위층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고, 소년이 “죽여 버릴 거야”라고 고함치는 소리를 들었으며, 마루에서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 소년이 계단을 내려와 도망치기에 경찰에 신고했다고 증언했다.

이웃 고물상은 그 소년이 사건 당일 밤 손잡이에 매우 특이한 무늬가 있는 칼을 사갔다고 증언했다. 그날 밤 피의자 소년과 만난 친구들은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칼과 피의자 소년이 보여준 칼이 동일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경찰이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하자 소년의 아버지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숨져 있었고, 경찰은 잠복 끝에 소년을 체포했다.

소년은 밤 11시30분쯤 영화를 보러 나갔다가 새벽 3시10분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숨져 있었고, 칼은 도중에 주머니에서 빠져 잃어버렸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영화 제목과 주연 배우 이름을 캐묻자 기억하지 못했다.

▲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 스틸 이미지

찜통더위 속에 배심원 12명은 최종결정을 위한 회의에 참석, 유죄 여부에 대해 투표한다. 결과는 11대1. 1명만 뺀 나머지 전원이 유죄 쪽에 표를 던진다. 이들은 만장일치 결정을 위해 토론을 시작한다. 참석자 대부분은 “범죄의 소굴인 빈민가에서 자란 애들은 잠재적 사회악이고 쓰레기”, “영화 보러 갔다는 것은 헛소리이고, 칼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등 소년의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믿는다. 소년이 구입한 특이한 칼이 범죄에 사용된 것이고, “죽여 버릴 거야”라고 말한 소년이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반대의견을 낸 1명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소년이 유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칼을 피의자 소년의 동네 전당포에서 구할 수 있었다고 보여주며, 살인 도구와 소년이 구입한 칼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자 목격자는 코에 안경 자국이 있는데 밤에 안경 벗고 잠을 청했다가 20m 거리의 사건 현장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 기차가 지나갈 때 소음이 매우 큰데 노인이 위층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소년이 정말 아버지를 죽였다면 3시간 후에 집에 돌아왔을까, 등 의문이 잇따라 제기된다. 매를 맞고 홧김에 “죽여 버릴 거야”란 말을 한다고 해서 다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나왔다.

의문이 추가될 때마다 무죄에 표를 던지는 배심원이 하나둘씩 늘어나다가 마침내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이 도출된다. 문제 제기를 시작한 배심원은 “언제나 편견이 진실을 가린다.”는 말로 상황을 정리한다.

우리는 성장배경, 빈부, 외모, 학벌 등에 따라 사람에 대해 편견과 고정관념을 갖는 경우가 많다. 편견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며, 고정관념은 부정확하게 일반화된 신념이다. 성별에 따른 편견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겠다.

▲ 김주혁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김주혁 가족남녀행복연구소장]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초빙교수
전 서울신문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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