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테마토크] 영화 ‘밀정’(김지운 감독,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배급)이 지난 추석 연휴 흥행을 싹쓸이했다. 18일 기준 ‘밀정’은 600만 관객을 돌파했고, 같은 날 개봉된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아직 100만 턱걸이도 못했다.

‘밀정’은 1920년대 말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의열단(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의 대결이란 기둥줄거리 안에서 이정출(송강호)이란 인물의 생존욕구 정의 명분 양심이 내걸린 갈등과 고뇌를 그린다. 모든 흥행영화들이 그렇듯 ‘밀정’에도 칭찬과 불만이 공존한다.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할까?

1. 시나리오와 연출 상의 허점
감독은 인터뷰에서 수차례 “스파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걸 기준으로 할 때 남의 나라를 완전히 점령하고자 하는 일본인들과,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선택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대한제국인들의 상반된 입장이 부딪쳤던 혼돈의 시대상과 개인의 카오스를 누아르로 설정한 스타일만큼은 훌륭했다.

그러나 문제는 각 캐릭터의 개연성이다. 경찰 부장 히가시가 정출을 ‘스카웃’한 점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완전하게 믿지 못해 창씨개명한 하시모토(엄태구)를 감시자로 붙인 것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그건 악랄한 친일파가 된 하시모토의 선택과도 맞닿아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데올로기를 떠나 나름의 통찰을 통한 결정이자 생존의 수단이기에 지극히 당연하게 비친다.

▲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정출은 원래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통역 일을 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에 정보를 제공해주며 배를 갈아타 일본 경찰의 간부가 됐다. 대한제국은 침몰하는 배였기 때문에 출세를 선택했다. 그런 그가 의열단 2인자 김우진(공유)과 서로 속고 속이는 심리전을 펼치는 과정 역시 매끄럽지만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만난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해 금세 의열단의 폭탄운반을 돕는다는 연결은 귀에 거슬리는 치찰음만 들려줄 따름이다.

물론 추론 혹은 짐작은 가능하다. 변절한 뒤 정출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웠을 수 있다. 채산은 우진에게 정출을 포섭하자는 반간작전을 제안하며 그 근거로 “변절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라고 설득한다. 정출 역시 우진의 제안에 마지못해 응하면서도 “다시 만났을 땐 내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른다”고, 일본경찰을 따돌리며 “원래 내 임무는 이게 아닌데”라고 뇌까린다.

하지만 시나리오와 연출이 정출이란 인물의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심리를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진 못한다. 송강호란 배우의 여우보다 더 영악하고, 너구리보다 더 능수능란한 표정과 대사의 화법과 캐릭터 창조력이 매우 훌륭하게 보완해줄 따름이다.

▲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그래서 송강호를 제외하면 사실 다른 배우들이 보이지 않는다. 우정출연한 이병헌의 존재감이 송강호를 압도할 듯한 무게로 공간의 공기를 짓누르고 유일한 여주인공인 한지민이 고문당할 때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주며 영화 중 가장 감정이 폭발하는 신을 완성하는 게 고작이다.

2. 공유 혹은 김우진의 미미한 존재감
뭣보다 송강호와 마주선 공유의 존재감과 정체성이 애매모호하다. 정확히 김우진이 멋있기만 할 뿐 극의 서사와 드라마에 별로 영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핸디캡이다. 정출은 채산을 잡기 위해 우진에게 접근한 밀정이다. 우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정출 역시 우진의 거짓을 알면서 자신만의 공작을 펼친다. 그런데 지나치게 쉽게 우진에게 포섭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설득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고, 그 키는 당연히 우진이 쥐고 있는데 공유는 그냥 멋있기만 할 따름이다.

결국 드라마와 서사의 구조는 아귀가 안 맞아 일그러지고 만다. 채산에게 유고가 있을 경우 의열단을 이끌어야 할 인물이 바로 우진인데 동료가 붙잡히자 울면서 흥분해 그를 구하겠다고 감정적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최악이다. 그토록 세상물정에 훤한 정출의 마음을 움직인 이성적인 사람이 맞나 의문이 들 정도다.

압권은 영화가 다수의 주인공의 심리전으로 전개된 누아르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정출을 앞세운 슈퍼히어로물로 장르적 변주로 전환된 순간이다.

▲ 영화 <밀정> 언론 시사회 현장

3. 시대적 아픔과 송강호의 열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수많은 관객들을 빨아들이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물론 재미다. 그 재미는 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선호도와 희소가치, 시나리오의 완성도, 쫄깃한 긴장감, 매끄러운 연출 등 여러 가지로 나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봐도 다수가 공통적으로 영화 속에 몰입돼간다면 일단 재미는 있는 것이다.

‘밀정’이 그렇다. ‘에이’라고 실망하거나 ‘저건 아닌데’라고 반박할 겨를도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김지운 특유의 누아르적 스타일과 훌륭한 캐스팅이 재미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음은 명분을 앞세운 차별화 전략이다.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의 한국영화라면 대부분 독립투사들의 눈물겨운 애국심과 국민들의 아픔에 포커스가 고정돼있었다. 지난해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암살’이나 최근 논란 속에서 558만 명의 스코어를 올린 ‘덕혜옹주’가 전형적인 애국심 고취의 프로파간다로 돈을 번 대표주자다.

그러나 ‘밀정’은 확연하게 다르다. 이 영화가 현미경을 들이대는 지점은 인간의 양심과 생존본능이다. 영화초반 정출은 독립운동을 할 때의 동지였던 김장옥(박희순)을 회유하며 “넌 이 나라가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니”라고 묻는다. 그건 사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변절한 데 대해 자신의 양심에 항변하는 비겁한 변명이다.

▲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의열단 내부의 밀정은 다름 아닌 우진의 죽마고우 조회령(신성록)이었다. 그 역시 “나 때문에 너희들이 여태껏 살아남았잖아”라며 자기합리화를 웅변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를 나쁘다고만 볼 순 없다. 김장옥과 함께 붙잡혔다 쉽게 풀려난 의열단원 한 명은 의열단 동지들에게 밀정이란 의심을 사고 결국 적으로 분류되는 공작의 희생자가 된다. 그 시대엔 누가 누굴 믿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감독의 돋보기는 사람들의 양심과 생존본능에 집착하고, 그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충격신에서의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re Smiling’, 폭파신에서의 라벨의 ‘Bolero’ 등의 음악은 시나리오와 연출의 허점을 눈치 못 채게 만든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모든 장점을 완성한 인물이 송강호 한 명이란 점이 이 영화의 강점이자 핸디캡이다. 더 이상의 극찬이 새삼스러운 송강호란 배우의 능력치와 그의 진화가 어디까지일지가 궁금해지는 ‘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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