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나이에 걸맞는 속도로 적당히 높아지는 혈압을 필자는 질병이 아니라 가령(加齡) 현상으로 본다. 흰머리가 늘고 피부가 늘어져 주름이 지듯, 보이지 않는 우리 몸속 생체 구조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쇠퇴해 간다. 계단을 두 칸씩 오르거나, 소화 기능이 떨어져 젊을 때처럼 많이 못 먹는 것을 질병으로 볼 수 없듯 말이다.

혈관을 예로 들어보자. 온몸에 피를 보내는 가느다란 파이프인 혈관은 모세혈관까지 모두 더하여 12만km다. 수도 파이프가 녹슬듯 엄청난 길이의 혈관도 노화의 과정을 거치면 외벽이 두꺼워지거나 콜레스테롤 또는 중성지방 등의 슬러지가 내벽에 침착되어 통로가 좁아지게 된다. 피의 흐름, 즉 혈행이 나빠지므로 혈관 내부 압력인 혈압이 올라감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 몸은 왜 혈압을 올리는 것일까. 손이나 발의 끝 부위, 성기 등 말초신경이 많이 분포한 몸의 말단으로 혈액을 원활히 공급하기 위함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므로 혈압이 올라간다는 것은 한편으론 축복 받을 일 아니겠는가.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생존 능력인 항상성을 맞서 싸워야 할 질병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사고는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혈압이 높아지는 것을 현대 의학에서 병으로 본다면 그것은 늙어가는 모든 이를 고혈압 환자로 만드는 행위다.

대한민국의 혈압약 시장 규모가 대략 1조5,000억이다. 뚜렷한 증상도 없다 하여 고혈압을 흔히 침묵의 살인자라 일컫는다. 건강한 대다수 사람이 실체도 분명하지 않은 조장된 공포 앞에 평생 약을 먹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것은 아닐까. 모든 사람의 체질이 다르듯 정상 혈압의 범위를 획일적으로 정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단순한 증상을 질환으로 보거나, 병의 범위를 확장해 의사의 역할을 늘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여성의 마음이 며칠 심란하면 증후군이요, 어린이가 좀 부산한 것을 가지고 과잉행동장애 어쩌고 하며 정신과 약을 먹이는 현실이다. 단순히 속이 좀 쓰릴 뿐인데 막을 형성해 위벽을 보호해 준다는 약을 냉큼 먹는다. 사실 위벽에 막이 생기면 큰일 아닌가. 제약회사 역시 대중이 먹을 수 있는 약을 만들어야 돈을 버는 구조다. 정상인을 환자로 만들지 못하면 예방하는 약을 먹이면 된다. 튼튼한 잇몸을 만들고, 혈액을 맑게 만드는 뭐 이런 식이다.

천문학적인 연구, 개발비 대비 이익이 나지 않는 것 또한 희귀질환 치료제의 개발을 제약회사에서 망설이는 이유가 된다. 경제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분야를 찾기 힘든 세상이다. 누군가 건강을 빌미로 불안을 조장한 후 무엇인가 권한다면 그 기저에 깔린 불순한 상업적 의도를 잘 판단하여야 한다.

돌이켜보면 필자의 인생은 혈압약을 권유받기 전과 그 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을 거부하고 병원을 뛰쳐나온 후 한동안은 나 자신이 고립무원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주위에선 걱정섞인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같이 술을 마시던 지인은 의사가 주는 약을 먹으면 기존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어리석고 안이한 권유를 내게 하기도 했다. 약을 만병통치의 수단으로 보는 시선이 팽배한 상황에서 필자에게 생활습관 개선을 조언해주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금주와 적당한 운동뿐이었다. 금주와 더불어 밤 늦게 먹는 일이 없어지자 체중이 눈에 띄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80kg을 넘나들던 체중이 60kg 후반이 되자 많은 변화가 몸에 찾아왔다. 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 마치 내 몸의 반만 가지고 올라가는 느낌과 더불어 혈압계의 눈금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혈관을 압박하던 체지방을 덜어내자 혈행이 좋아진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금주 후 7년이 지난 지금 필자의 혈압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혈압약을 거부한 채 형광등을 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의 예를 필자에게 들려준 의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필자는 형광등을 갈아가며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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