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걷기왕>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테마토크] 독립영화의 매력은 대다수의 상업영화가 가진 재미와 스케일 그리고 거창한 화려함을 기대할 순 없는 대신 놀랍도록 신선하다는 데 있다. 지금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블록버스터용 감독이 된 피터 잭슨이나 샘 레이미는 독립감독 시절 주머니를 털어 직접 핸드헬드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열정으로 관객들에게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을 던져주며 컬트의 고전 ‘고무인간의 최후’와 ‘이블 데드’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현재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크리스토퍼 놀란도 기억이란 소재 하나로 ‘메멘토’란 충격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로 선댄스영화제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대감독 탄생의 서막을 알린 바 있다.

‘써니’와 ‘수상한 그녀’를 통해 스타덤에 올라선 독립영화적 이미지의 스타배우 심은경을 내세운 ‘걷기왕’(백승화 감독, CGV아트하우스 배급)은 순수제작비 5억 원을 들여 한 달여 만에 촬영한 독립영화다. 경보라는 비인기 스포츠를 소재로 했다는 점도, 로토스코핑 애니메이션(실사에 그림을 덧입히는 것) 등 애니메이션과 일부 캐릭터의 내레이션으로 유머를 더한 점 등은 꽤 쏠쏠한 재미를 준다. 무릎을 탁 칠 만큼 재기발랄한 개성은 엿보이지 않지만 독립영화도 이 정도면 하품하지 않고 충분히 즐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측면에서만큼은 긍정적이다.

▲ 영화 <걷기왕> 스틸 이미지

강화도 남녀공학 고등학교 1학년 만복(심은경)은 아주 평범한 집안의 딸이다. 부모의 금슬은 좋아 어머니 뱃속엔 아들로 추정되는 남동생이 발차기를 하고 있고, 단독주택 한 구석엔 듬직한 황소 소순이의 단칸방도 있을 정도로 경제력을 갖췄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녀 나이 4살에 발견된 선천적 멀미증후군. 자동차는 물론 자전거도 못 탈 정도로 모든 탈것에 심한 구토를 일으킨다. 그 탓에 왕복 4시간 걸려 학교를 오가느라 매일 아침 지각을 밥 먹듯 한다.

여자 담임선생(김새벽)은 ‘꿈을 향한 열정과 간절함’이란 책을 인생의 지침서 혹은 학생들을 향한 계도의 바이블로 여기는 사람이다. 성적이 시원치 않고, 특기나 열정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만복의 진로상담을 하던 중 그녀가 아침에 2시간씩 걷느라 지각한다는 사실에 집안사정이 어렵다고 판단, 하굣길을 함께 걸어 만복의 집을 방문한다.

▲ 영화 <걷기왕> 스틸 이미지

그러나 예상외로 부유하고 모권이 강한 가정인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안심하고 돌아온 뒤 만복의 걷기 능력을 살려주기 위해 다음날 육상 코치(허정도)에게 만복을 소개한다. 담임선생을 짝사랑하는 육상 코치는 만복의 가능성 따윈 관심도 없고 오로지 담임선생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복을 받아들인 뒤 3학년 경보 에이스 수지(박주희)에게 맡긴다. 곧 있을 전국체전을 목표로 만복의 도전이 시작된다.

수지는 원래 마라톤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희망을 빼앗긴 뒤 절망하지 않고 경보로 진로를 수정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지만 만성부상으로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 그래서 겉으론 자신감 넘쳐 보이지만 사실 모든 게 무서운 그녀다. 그녀의 모토는 ‘목숨 걸고 하자’인데 그렇게 해도 메달권에 들까 말까 할 텐데 만복은 재능도 열정도 전혀 없어 보인다.

당연히 수지와 만복은 갈등한다. 수지는 만복에게 “공부는 하기 싫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으며, 운동은 왠지 쉬워 보여 하는 게 아니냐”며 업신여기고, 아버지(김광규)조차도 “그딴 걸 뭐하려 하냐.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을 주자 만복은 결국 포기한다.

▲ 영화 <걷기왕> 스틸 이미지

수업시간에 매번 조는 만복과 달리 그녀의 단짝 지현(윤지원)은 모범생이다. 그녀가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희망을 봤기 때문이 아니라 일찍이 주제파악을 했거나 절망을 봤기 때문이다. 그녀의 희망은 그저 공무원이 돼 ‘칼퇴근’한 뒤 집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쉬는 것이다.

열정을 강요하는 담임선생에게 그녀는 “왜 힘든 걸 참아야 하죠?”라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꿈과 희망을 잃은 N포세대 젊은이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듯하다.

영화의 주인공은 만복 수지 지현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청춘이다. 만복은 무사안일의 표상이고, 수지는 절망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실낱같은 열정이며, 지현은 철저하게 현실에 순응하는 생계형 포기다.​ 

또래들이 봤을 때 가장 이상적인 캐릭터는 지현이다. 이 시대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은 ‘안정’된 직장이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들어간들 ‘빽’이 없으면 부장 진급도 못 한 채 조기퇴직해야 하거나 그나마 그때까지 근무할 수 있어도 감지덕지인 게 냉엄한 직장의 세계다. 그럴 바에야 사고만 안 치면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이 안정적이다. 어차피 노력의 강도는 비슷할 테니 일찌감치 제 주제를 인정하고 조용히 ‘가늘게 먹고 길게 사는’ 길을 택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이 ‘어린 아이’는 일찌감치 영악하게 판단을 내린 것이다.

▲ 영화 <걷기왕> 스틸 이미지

수지는 매우 역설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마라톤 실력은 타고났다기보다는 노력의 뒷받침이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만약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육상으로 큰돈을 벌어 오랫동안 잘 먹고 잘살았다는 보장은 없었을 것이다. ‘라면 먹고 달렸다’는 임춘애는 이미 잊힌 지 오래다.

그래서 수지는 ‘죽기 살기’로 달린다. 그렇게 해도 잘 될까, 말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딴다고 해서 향후 생계가 편하게 보장된 것은 ‘물론’ 아니다. 영화에도 등장하듯 경보가 인기종목이 아니라 선수도 후원처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의 프로야구 스타 출신이 범죄에 연루된 뒤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경보는 비인기 아마추어 종목이다.

감독은 경보(race walk, 競步)를 소재로 이 시대 청춘의 앞날에 매우 위험한 경보(warning, 警報)가 발효 중임을 웅변하려 한 것은 아닐까?

▲ 영화 <걷기왕> 스틸 이미지

물론 주인공이 만복이라는 점에선 영화는 상쾌한 해피엔딩을 그린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무조건 ‘빨리 빨리’를 외치며, 가능성 1%도 안 되는 성공을 향한 허망한 열정을 외쳐대는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더 나아가 젊은이들이 가져야 할 것은 꿈이 아니라 여유라고 위무한다. 어차피 치열해도 1% 안에 못 들어가긴 마찬가지일 바에야 그냥 만복처럼 ‘Que sera, sera’(될 대로 되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노래대로 유유자적하며 살든가, 지현처럼 최소한의 욕심으로 최대한의 확률을 따르든가 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 면에서 수지야말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비현실이다.

깜짝 놀랄 만한 아이디어나 철학적 메시지의 독립성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재미가 웬만한 상업영화 뺨을 세 대쯤 때린다. 소순이의 정체와 ‘그녀’의 내레이션 등 곳곳에 ‘키득키득’의 소재가 포진돼있다. 심은경을 보러갔다 박주희를 발견한다. 12세 이상 관람 가. 2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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