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민범의 다정다감(多情多感)] 흥청거리는 밤, 마음을 다잡고 책상에 앉는다. 마음은 먹었지만, 넓은 공간을 무슨 수로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 천천히 그대를 생각하며 한 글자씩 적는다. 밤은 흐르고, 평소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자꾸 생각난다.

마침표를 찍고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본다. 아직 다 담지 못한 마음이 못 내 걸린다. 짧은 글이지만, 꾹꾹 눌러쓴 문장을 눈치채 주기를 바라며 봉투를 닫는다. 당신이 조금은 느리게 읽어주기를 바라며 편지를 건넨다.

편지를 쓰는 일은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먼저 편지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하고, 책상에도 앉아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고 쓰기 시작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불쑥 생각나서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글이 된다.

수정도구를 사용하면 지저분하니, 한 글자라도 틀리지 않기 위해 집중해서 쓴다. 이렇게 드는 품에 비해 상대가 읽는 시간은 짧기만 하다. 경제적이지 못 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간혹 받고 싶지 않은 선물 순위에 오르기도 하고, 군인 때나 잠깐 하는 일로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편지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편지를 건네는 건 그 편지를 쓰는 동안은 온전히 상대를 생각한 시간과 마음을 선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편지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이탈리아로 망명 온 칠레의 대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작은 도시의 우체부를 연결해 주는 것은 편지다. 우체부 루폴로는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시를 배운다. 시를 배운다는 건 진심을 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비록 네루다의 시를 차용한 편지였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여인 베아트리체에게 편지를 전한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젊은 여인의 가슴에 불을 집힌 것은 잘생긴 외모, 화려한 언변, 막대한 재력이 아니라 손으로 눌러쓴 편지였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이라는 영화로 더 익숙한 ‘시라노’는 프랑스 희곡가 ‘에드몽 로스탕‘이 쓴 <시라노>라는 희곡에서 나온 이름이다. 극 중에서 시라노는 문무의 재능을 가진 귀족이지만, 기형적으로 생긴 코를 가진 추남이다. 외모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록산이라는 여인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록산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연애편지를 대필한다.

모든 소동의 끝에서 록산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편지 속 시라노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도 편지가 진심을 전한다.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는 그 사람을 닮는다. 록산이 시라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말이 아닌 문장이 가진 진심 덕분이다.

시인들이 자신들의 첫사랑에게 쓴 편지를 모은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라는 책을 보면, 하나같이 절절하고 애틋하다. 그들의 첫사랑은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수 십 년의 세월이 지난 이야기다.

세월이 지나서 쓴 문장들이지만, 또렷한 감정은 모두 진심이다. 조용미 시인은 ‘당신과 함께했던 봄은 단 한 번뿐이었지만 혼자서 보낸 봄들도, 나머지 봄들도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해마다 봄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애틋했습니다’라고 조용히 고백하고, 이근화 시인은 ‘너는 나와 함께하고 있어. 툭 털어냈는데 도로 와서 앉고는 해. 그건 너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서 날마다 조금씩 다른 너와 만난다’고 깨닫기도 한다.

글은 말보다 무거워서 시인들에게도 편지를 쓰는 일은 어렵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는 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편지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날, 하루에도 몇 번씩 소통을 이야기하고, 각종 톡을 통해서 초 단위로 생각을 주고받는다. 이에 반해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은 느리다. 말과 달리 문장을 짓는 일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편지를 쓴다. 진심은 내가 상대를 생각한 시간에 비례해서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편지를 쓰는 동안 상대를 이해하고, 내 감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는 시작으로 답장 받을지도 모르고,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에게는 쓴 편지에서는 반가움을 건네고 애틋함을 받을 것이다.

부모님에게 쓴 진심을 담은 편지는 고마움을 전한다. 오래전 첫 사랑에게 쓰는 편지는 내 마음을 일렁이게 할 것이다. 이렇듯 문장을 짓는 밤에서 새로운 소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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