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먹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거나, 밥알을 세며 먹을 정도로 입이 짧은 사람이 있다 치자. 이 자가 젓가락처럼 말랐다면 별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엄청난 폭식가 임에도 날씬한, 더 나아가 야윈 모습을 유지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몇 달 전 아무리 먹어도 살찌지 않는 여성 푸드 파이터가 T.V에 소개된 적이 있다. 평범한 월급쟁이에 불과한 남편은 돈 벌어 아내의 음식을 대느라 곤혹스럽다며 너스레를 떤다. 먹어치우는 음식의 양이 일반인의 몇 배니 그럴 만도 하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믿음이 가는 우리를 위해 친절한 방송은 아예 튀김 닭을 주문해서 몇 마리 가져다 놓았다. 실제로 많이 먹는지, 전 국민 앞에서 드셔 보란 건데, 부담스러운 그녀를 위해 배석한 패널도 같이 먹도록 세심히 배려했다.

여성이 비만했다면 저 자리에 앉지 못했을 것이다. 대식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바짝 야윈 모습이다.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식사는 시작되었고 그녀가 1.5리터 페트병에 담긴 사이다를 마셔가며 닭 한 마리를 먹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평소 즐기는 다양한 종류와 많은 양의 음식 역시 열량이 높다 한다.

그녀의 사례를 접한 일반인들의 반응은 대략 두 가지다. 왜 살찌지 않는지 궁금함과 동시에 먹고 싶은 대로 먹고도 균형 잡힌 몸매로 살 수 있으니 부럽다는 반응이다. 날씬한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음식의 유혹을 뿌리치는 현대인의 처지에서 보면 시쳇말로 그녀는 대박인 셈이다. 그녀가 두 번째 닭의 다리를 들자 방청객 사이에서 단말마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켜보는 이들은 어우 라는 감탄사를 통해 나도 먹고 싶다와 그녀가 얄밉다를 고작 표현할 뿐이다.

필자도 맛진 음식을 마음껏 먹되 살은 안 찌는 방법을 개발해서 널리 알려보고 싶다. 물론 내게 먼저 적용한 후에 말이다. 달콤한 음식 앞에서 침은 흘리되 선뜻 손을 못 댄다면, 이유는 돈이 없거나, 살찔 걱정 때문일 것이다. 소식을 실천하려 애쓰는 필자 역시 치솟는 식욕을 억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대리만족 탓일까. 허기가 느껴지는 밤일수록 쌍둥이 야식을 챙겨주는 빈도가 높다. 혹은 아내가 챙겨주더라도 필자는 그 곁을 서성인다. 먹지도 않으면서 밥상을 지키는 내게 왜 자지 않느냐 아내가 묻지만, 명확히 답을 하지 못한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아들 녀석들이 남긴 면 가닥이 유난히 굵고 윤기가 흐름이 느껴진다. 남긴 거라도 먹을까 고민하지만 결국 그 몇 젓가락이 라면 한 그릇을 새로 끓이게 하는 단초가 된다. 공복감을 견디는 게 만만치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는 이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살찔 염려가 없으니 경제적 뒷받침만 가능하면 매끼 산해진미에 푹 젖어 산 들 어떠리.

그러나 주위에 간혹 있는 야윈 폭식인들의 문제는 생각처럼 단순한 게 아니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많이 먹어도 살찌지 않는다는 것은 남들보다 많이 먹어야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음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이 온다면 이들은 견뎌낼 재간이 없다. 적은 양으로 살아갈 수 있는 효율적 몸을 가진 대다수 사람이 마냥 그들을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최대한 궁핍한 세월을 견디며 우리의 몸이 획득한 절약 유전자를 그들은 갖지 못한 결과로 해석된다. 혹은 갑상선의 기능이 항진될 정도로 좋거나 음식물의 소화흡수율이 현저히 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일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공짜가 없다. 문제는 영양소의 대사과정에 있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고 생존할 에너지를 뽑아야 하니 대사의 중심인 위와 장, 흡수된 영양소를 처리하는 간과 배설을 맡은 신장 등 우리 몸의 여러 장기에 많은 무리를 줄 수 있다. 살찌지 않음이 곧 폭식의 허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섭취하는 열량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자신의 몸에 적합한 섭생 지침을 찾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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