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황성하 청춘칼럼] 오늘도 어김없이 손님들이 밀려들어온다. 고깃집에는 대학생부터 직장인, 노인들까지 한꺼번에 몰려온다. 나는 그 가운데서 서빙을 하는 아르바이트생이다. 하는 일이 고되긴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당장 휴대폰 요금과 용돈을 낼 수 없기 때문에 묵묵히 오늘의 아르바이트를 감당해낸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도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역시 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에 나갈 연습을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돈 때문이다. 하나같이 최저시급과 월급 날짜에 민감한 걸 보면.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나면 싱크대에 쌓여 있는 컵들을 하나하나 씻어 선반에 올려야 한다. 고무장갑을 끼고 컵 둘레를 수세미로 문질러가며 컵을 씻는다. 물기를 빼느라 일렬로 늘어놓는 동안 컵 표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둥글게 퍼진 얼굴을 바라보며 ‘이게 청춘이냐’하는 생각이 훅 가슴을 치고 간다.

어른들은 ‘청춘’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민감하다. 외국 여행에서 사온 알록달록한 유리컵처럼 대한다. 찬장에 올려두고 만지지도, 사용하지도 않고 감상만 하는 것. “청춘이란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이야.” 하고 일러주는 것 같다.

나는 사실 그런 태도가 부담스럽다. 청춘이 택배처럼 초인종을 누르고 나에게 배달된 것도 아니라서 청춘이 어떤 것인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겨우 대학 입시를 치르고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벅차고 감격스럽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청춘의 나이’라는 타이틀까지 떠안으면서 나는 반짝거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sns에는 해외여행 사진, 친구들과 맥주마시며 청춘을 즐기고 힐링을 하는 사진과 글이 가득했다. 정작 나는 고깃집 불판을 닦고 뚝배기를 나르고 입술자국이 묻은 물컵을 하릴없이 씻고 있는데. sns 안에서 그들은 할아버지의 기념품처럼 소중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청춘이 뭔지 알까?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내일로’라는 여행을 떠난다. 청춘여행이라는 타이틀을 단 이 기차는 만 25세까지로 제한을 두고 있다. 마치 청춘의 나이가 딱 거기까지라고 단정 짓는 것처럼 단호하다. 나는 아직 내일로를 타본 적도 없고 타볼 생각도 없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누군가 말한다. “왜?” 여수를 갈 때는 우리 지역에서 여수까지 직행 기차를 탔고 서울에 갈 때는 무궁화호를 탔다. 굳이 청춘열차에 타지 않아도 나의 청춘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나를 데려다주고 부대낌 없이 낮잠을 자면서 여행하게 해주었다.

나는 친구들과의 여행을 미뤄두고 가족여행을 선택하기도 했다. 엄마 아빠의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에 오빠와 나까지 함께 가는 것은 굉장한 추억이었다. 그 비행기에는 청춘이라는 이름은 절대 붙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사진앨범에 청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더욱 자연스러웠다.

tv에서는 청춘이 왜 뜨거워야 하는지, 왜 빛나야 하는지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나는 학점 관리에 열중하는 선배들의 푸념과 연애에 실패하고 엉엉 우는 나의 친구들이 빛나지 않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들의 땀과 눈물에서 어렴풋이 청춘의 떫은 향이 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덜 익은 열매를 나무에서 따면 그 열매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한다. 청춘이라는 이름에 이것저것 수식어를 달아놓고 이렇게 되어야 해, 라고 강요하면 그 때부터 청춘은 빛을 잃어버린다. 누가 강요해서 만들어지는 빛은 형광등에 불과하다. 빛이 다하면 슈퍼에 가서 새로운 형광등을 사오면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청춘은 새벽 머리맡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불빛이고, 늦은 밤 고기냄새를 풍기며 맞는 가로등 불빛이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흘러오는 담배연기를 어쩔 수 없이 맡는 게 청춘이다. 누가 나의 정의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청춘의 물컵은 사용되어야 한다. 서랍 속에 간직하는 기념품은 소용이 없다. 찬장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유리컵보다 매일 사용되고 깨끗하게 씻어지는 스테인리스 물컵이 나는 더 소중하다.

어느 한 사람에게 나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이불 속에서 엉엉 울게 되는 날. 그런 날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정성스럽게 닦아주며 나를 쓰다듬어주게 된다. 그러면서 손등 위에 시퍼렇게 날이 선 힘줄을 바라보곤 ‘그래, 이런 게 푸른 청춘이지’ 하면서 바보 같은 웃음을 짓는 것.

나의 청춘은 그렇다. 실컷 울고 부러워하고 어쩔 수 없이 거울 앞에 서는 것.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언제 저걸 다 치우나’하고 한숨 쉬는 것. 어쩌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은 날에는 나의 청춘도 빛이 날 것 같고 우리의 건배는 반짝거릴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런 착각들이 맥주거품처럼 가볍다는 것 역시 금세 깨닫는다. 나는 이런 날들을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해주니까 말이다. 청춘의 찬란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나는 묵묵히 오늘의 횡단보도를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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