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 위해] 비만과 건강에 관한 질문 중 아침을 먹는 것이 좋은지, 하루의 첫 식사를 점심부터 해도 되는지, 필자에게 묻는 분들이 많다. 하루 벌어 연명하며, 내일의 굶주림을 걱정하던 시절에 비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질문이다.

명확한 답을 대기 위해선 백 프로 똑 부러지게 떨어지는 정답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영 그렇지 않다. 필자가 즐기는 논리는 과거의 습성이 이러했으므로 우리의 몸이 거기에 부합하도록 행위를 하는 게 맞다 뭐 이런 식이다. 과거 해가 떨어지면 암흑천지가 되어 일찍 잠들었으니 현재의 우리가 대낮과 같이 밤을 밝히고 낮 생활을 연장하는 것은 건강상 불리할 것으로 유추하는 방식이다.

결국, 우리 유전자의 적응 방식을 쫓다 보면 건강을 지키는 정답이 어렴풋이 보인다. 예전엔 들어있지 않았을 방부제나 첨가물이 함유된 음식을 적극적으로 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격받을 일 없이 안전해 보이는 이 논리는 하루 세 끼를 챙기는 것이 건강에 유용하냐는 질문에 목에 떡이 걸리듯 탁 막힌다.

하루에 몇 식을 할 것이냐는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대부분 논리와 설득력을 갖춘 주장이라 선뜻 어느 쪽에 줄을 서기도 쉽지 않다. 몇 년 전 돌풍을 일으켰던 1일 1식을 예로 들어보자.

일본의 나구모 요시노리 박사의 1일 1식은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지키기 쉽지 않다. 모임과 먹을 것이 넘치는 현대인에게 고립무원과 같은 생활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루 중 유일한 식사이므로 그에 걸맞은 모든 영양과 열량을 한 끼니에 담아야 하므로 식사 준비가 절대 만만치 않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우리 몸이 젊어지는 소리라는 논리도 있다. 성장 호르몬이 회춘 호르몬과 동격이라 한번 꼬르륵 할 때마다 피부와 소화기가 젊어진다는 논리다. 두 번 꼬르륵하면 세포 속 유전자까지 젊어진다고 한다.

일단의 호사가들은 굶어 죽는 사람은 굉장히 젊어져서 죽겠네? 라며 이 이론의 틈을 비집고 들어 올 것이다. 아무리 건강을 위한다지만, 비어있는 위가 내는 소리까지 들으며 살고 싶진 않다. 하루 몇 번 식사를 할 것이냐의 논란 중 분명한 점은 유사 이래 인간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기지는 못했다는 거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 계급의 출현과 학교, 그리고 직장 생활의 보편화 등으로 3끼 식사가 규칙처럼 되었지만, 현재도 많은 사람이 두 끼 식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운명처럼 여기는 우리는 과거 몇 끼의 식사를 했을까.

한국인에게 밥은 단순히 식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밥의 힘을 빌리고, 밥값을 벌기 위해 살아온 우리에게 밥은 역사, 생활, 문화 등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운명과도 같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포만감이 아니라 굶주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시작하는 주 기도문과 식사하셨냐는 인사는 두 끼는 커녕 하루 한 끼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던 장구한 세월이 최근까지 이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음식을 풍족히 먹을 수 있는 능력, 즉 대식(大食)은 곧 권력이었다.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김춘추의 하루 식사량이 쌀 여섯 말에 꿩 열 마리다. 일하는 자와 먹는 자의 차이가 바로 계급이었으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농민은 허리가 휘게 일하고 양반들은 그 쌀로 술을 빚어 유유자적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백성들의 밥을 챙기는 것이 정치이자 위정자의 도리였다.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선거철마다 우리 사회에 밥을 거저 주느냐, 마느냐의 논쟁과 갈등이 반복된다. 공짜 점심을 주겠다 하고 표를 받은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사회적 합의를 뒤집기도 한다.

학생들의 밥값을 다시 걷으려면, 자신의 푯값부터 뱉어야 할 일 아닌가. 어찌 되었거나 밥은 건강 차원이든, 정책 차원이든 논란거리임에 분명하다. 몇 끼 식사가 건강에 이로운지 다음 호에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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