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테마토크] 다수의 명작은 작가의 사후에 그 진가를 인정받아 가격이 폭등하기 마련이다. 가요계에도 웬만큼 평가받던 가수가 죽은 뒤 아예 신격화되는 경우는 많지만 무명이 사망 뒤 유명이 되기는 쉽지 않은데 그 희귀한 사례가 바로 유재하다.

가창력 음악성 인기 창의성 온고지신(신구의 조화) 등을 망라한 종합점수에서 가수 1위를 손꼽으라면 조용필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가 7집 앨범 ‘여행을 떠나요’(1985년, 지구레코드)에서 파격적으로 신인의 곡을 받았으니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다. 슈퍼스타의 앨범에 수록됐음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이 곡은 2년여 뒤 작사 작곡자인 유재하가 사고로 요절하자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유재하는 1987년 11월 1일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만 25살에 데뷔앨범(서울음반)을 낸 지 1달여 밖에 안 된 상황. 서울음반이 유작앨범의 타이틀곡 ‘지난날’을 부지런히 홍보하자 음악 자체의 완성도 덕에 순위에 올랐고, 조용필이 불렀어도 사장됐던 ‘사랑하기 때문에’가 덩달아 사랑받게 됐다.

더불어 당시 가요계엔 생소한 보사노바 리듬의 재즈록퓨전 ‘우울한 편지’가 유재하의 사고사란 비극적 운명과 맞물려 명곡 반열에 올랐다. 물론 라디오 PD들의 공로도 컸다. 팝과 가요가 7대3의 비율로 분할했던 국내 음반시장 판도를 가요가 역전하던 과도기였는데 때마침 마이클 프랭스란 미국가수가 ‘Vivaldi's song’과 ‘Antonio's Song’을 국내시장에서 히트시키며 보사노바 열풍을 일으키던 와중이었다.

▲ 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 이미지

특히 마이너 스케일의 ‘Antonio's Song’이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는데 이와 견줘 전혀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더욱 암울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 ‘우울한 편지’가 고인의 안타까운 사연 등과 맞아떨어져 폭발적인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곡은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유재하의 부상은 이변이라기보다는 발라드와 가요(트로트)로 양분되던 시장구조 속에서 외면됐던 음악성의 본질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자연스레 해방구를 찾은 결과다. 유재하의 작법은 기존 가요의 ‘AABA’라는 단순한 틀을 넘어서 재즈는 물론 클래식의 베이스와 화성을 가져왔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평가받는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흔히 발라드로 분류되지만 댄스 록 블루스 재즈 심지어 트로트로도 전환이 가능한 절묘한 형태다.

유재하 역시 ‘발라드의 신동’ 등으로 수식되지만 그렇게 규정하기엔 그의 음악은 매우 넓고 깊다. 뒤늦게 가요계에선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뮤지션들이 존경심을 감추려하지 않는 가운데 그의 이름을 딴 싱어 송라이터 발굴 경연대회가 정기적으로 열릴 정도로 붐이 일었다.

지난 4일 개봉된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주지홍 감독, NEW 배급)는 제목에서 보듯 유재하에서 모티프를 따왔고 유작을 모티브로 활용한다. 유재하가 앨범을 낼 당시 가요계에선 스타 가수나 작곡가보다 편곡가가 더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이 젊은 싱어 송라이터는 직접 편곡을 해냈다. 1명이 연출 촬영 각본 주연 편집 등을 도맡아 영화 한 편을 완성한 셈이다.

▲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 스틸 이미지

영화는 연인에게 프러포즈하기 위해 들뜬 가슴으로 데이트 장소로 향하던 작곡가 이형(차태현)이 교통사고로 코마상태에 빠지면서 시작된다. 유재하의 사고사 당일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그리고 내내 “유재하는 죽은 게 아니라 음악으로 살아있다”는 대사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음악이란 매개체로 대중의 고독과 상처를 치유하고 감동시키며 남아있는 걸출한 뮤지션에 대한 헌사를 아끼지 않는다.

‘천재는 요절한다’고 했다. 그래서 ‘지나치리만치 예쁘기에 하느님이 하루 빨리 곁에 두고 싶기 때문에’라는 다소 억지스런 이유까지 등장한다. 아마 더 많은 활약으로 전문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절했기에 안타깝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유재하가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대중음악계는 어땠을까? 물론 위대한 뮤지션 한 명이 음악계의 구도 전체를 바꿀 순 없다. 조용필이 우리 가요발전에 공헌한 바는 크지만 그렇다고 판도를 완전히 바꿨다고 볼 순 없다.

조용필은 올라운드플레이어여서 변별성을 갖췄다.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은 물론 뛰어난 기타리스트로서의 음악 전반에 걸친 다양한 능력을 뽐냈다. 뿐만 아니라 록 블루스 퓨전재즈 국악 트로트 등 손을 대지 않은 장르가 없었다는 점 역시 유니크하다.

그는 인기로도 최정상에 오른 슈퍼스타였다. 그럼에도 일찍이 방송사의 연말시상식을 거부했고, TV출연을 자제하더니 결국 스튜디오 쇼 시스템을 완전히 떠나 오로지 앨범과 콘서트(라이브)로써만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을 굳혔다.

소위 서태지가 시작했다는 ‘신비주의’나 ‘정규앨범 사이의 활동중단’이라는 시스템은 이미 그 전에 조용필이 선구자로서 개척해냈던 것이다.

유재하는 스타로 분류하긴 애매하다. 조용필처럼 국악이나 트로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지만. 하지만 다소 경박한 ‘사랑타령’ 정도로 치부됐던 가요마저도 고급스럽게 즐기고 싶었던 대중의 지적인 허영심을 충분히 만족시켜줌과 동시에 후배 뮤지션들에게 가요가 가야할 바람직한 수준의 발전의 길을 제시해줬다는 데서 그 값어치는 확연히 빛난다.

기존에 비제도권 음악 신은 언더그라운드라고 했고, 그 주역은 들국화와 김현식의 동아기획 레이블 아니면 시나위 등의 헤비메틀 밴드였다.

그런데 유재하를 기점으로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인디뮤직 신 시대가 도래, 다양한 장르와 형태의 인디밴드 및 힙합뮤지션들이 지상파 방송사와 대형 케이블TV가 주도하는 제도권과 반대되는 개념의 진보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강한 개성을 앞세운 독립적 가요문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창작의 영역이, 제작의 시스템이, 소비자의 선택의 폭이 각각 무한대로 넓혀졌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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