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방송국이라 봐야 KBS와 MBC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던 1980년대. 연말이면 양사는 한 해 활발하게 활동한 가수들을 모아 시상을 하거나 남자팀 여자팀 등으로 나눠 청백전을 펼쳐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다. 일본 NHK의 ‘홍백가합전’을 흉내 낸 것이다.

어쨌거나 시청자들은 평소 한 무대에서 보기 힘든 인기가수들을 한꺼번에 보는 것은 물론 그들의 컬래버레이션(협업) 무대를 공짜로 구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공연문화라야 지방순회쇼나 밤무대가 고작이고, 톱가수의 리사이틀 무대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던 시절이었으니 ‘눈 호강’ ‘귀 호강’이었다.

1990년대엔 각 기획사간 경쟁이 치열한 데다 한 소속사 안에서도 내부경쟁이 첨예했기에 협업은 쉽지 않았다. 심지어 한 팀의 멤버끼리도 서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때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한 기획사의 가수들끼리는 물론 다른 소속사의 가수들 사이의 협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내 귀에 캔디’의 백지영과 옥택연, ‘썸’의 소유와 정기고, ‘트러블메이커’의 현아와 장현승 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추세.

이는 소위 아이돌그룹의 한계를 깨기 위한 새로운 돌파구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이다. 퍼포먼스에 강하고 각자의 개별활동 등으로 부가수입 창출에 유리하지만 상대적으로 음원판매나 음악성의 한계라는 핸디캡에 번번이 부딪치고 마는 아이돌그룹의 새로운 수익과 활동영역의 확장 차원에서 매우 바람직한 번외활동 혹은 부업이 된 것이다.

더불어 기성가수가 아이돌에게, 혹은 아이돌이 대선배 가수에게 손을 내미는 패턴까지 도입됐다. 2013년 최백호(67)와 손을 잡고 ‘아이야 나랑 걷자’를 발표한 아이유가 대표적이다. 당시 아이유는 아이돌그룹을 포함한 또래 여가수 중 인기 절정의 싱어 송라이터였으니 최백호 입장에서도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유로선 신곡 발표 때마다 자주 따라다니던 논란을 벗어던질 수 있는 썩 적절한 전략이었다.

최백호가 데뷔 40주년을 기념해 이달 새 앨범을 내고 내달엔 기념콘서트도 연다. 싱어 송라이터인 그는 이번 앨범에 자작곡은 2곡만 수록하고 7곡은 에코브릿지에게 받았으며 주현미와 듀엣도 했다. 재킷디자인도 나얼에게 의뢰했다. 조금 새로운 형태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아이돌의 단골 과외활동인 협업은 어떤 의미고 최백호라는 가수는 누구인가?

부산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최백호는 생후 5개월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부터 펜보단 기타를 가까이 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의가사제대한 뒤 선배가 운영하는 부산의 한 라이브 클럽 무대에 올랐고 운 좋게도 윤시내의 ‘열애’를 작사한 부산MBC 라디오 DJ 배경모에게 발탁돼 더 큰 무대로 옮겨간다.

그러던 중 앞서 상경해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성공한 선배 하수영의 도움으로 그의 친구의 여동생인 윤정하와 함께 1977년 스플릿 음반으로 정식 데뷔하게 된다. 이 음반엔 두 사람의 노래가 뒤섞여 수록됐는데 최백호 작사, 최종혁 작곡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와 ‘뛰어!’가 히트하면서 사진을 최백호 한 명으로 바꾼 재킷으로 수정돼 재발매되며 무려 8만 장이란 판매고를 기록한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지면 설움이 더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 일을 잊으리라/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1970년 10월 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최백호의 사모곡이다. 당시 젊은이들이 즐긴 가요는 포크 스타일. 통기타를 둘러멘 최백호는 그 유행의 카테고리 안에 있었지만 노래의 형식만큼은 조금 달랐다. 포크나 가요의 틀에 박힌 클리셰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한 면에선 송창식과 닮았지만 ‘뽕짝’이나 국악을 도입한 송창식과는 차별화된 독자적인 포크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노래는 특히 가사가 청자의 심금을 울리거나 정서에 깊게 파고들어갔다. 적지 않은 뽕짝이 유치하고 저급한 가사로 억지로 청자의 싸구려 감정에 호소했다면 최백호의 가사는 저만치 앞선 거리에서 휘적휘적 고독의 발걸음을 축지법으로 걷는 스타일이었다.

대중가요 가사의 대부분이 남녀의 사랑과 이별일 때 그는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친구와의 우정과 낭만에 건배했다.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 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영일만 친구’)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엔 너의 웃음이/ 지난날들 돌아보면 숱한 우리 얘기/ 넓은 너의 가슴 열리고/ 마주 쥔 두 손엔 사나이 정이/ 정든 우리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입영전야’)

특히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가 나오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입영전야’가 갖는 의미는 남녀 모두에게 각별했다. ‘입영열차 안에서’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대 나를 잊을까’라며 군 입대로 헤어지는 연인을 벌써부터 ‘고무신 거꾸로 신을까’ 걱정하거나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기 싫었어’라고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입영전야’는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젊음을 위해 잔을 들자’고, 담배연기 자욱한 술집에서 아쉽지만 나름대로 흐뭇한 밤을 보낸다고, 진취적으로 축배를 들고 있다. 왜?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는 당연히 가야하고 그 사이 우정이 변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뒤 경제적 어려움과 이혼 등의 아픔을 겪으며 미국생활을 거친 뒤 1995년 되돌아온 그는 많이 달라졌다. 마치 한국전쟁 직후의 허름한 살롱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스패니시 라틴 스타일의 편곡에 가요적 멜로디를 얹은 형식의 ‘낭만에 대하여’로 이제 어느 정도 인생의 질곡을 겪고 나름대로 노숙해졌을 또래들과의 눈높이 대화를 하려 든 것이다.

▲ 사진=kbs 방송화면 캡처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중략)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중략)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실연이 달콤하다고 표현한 것은 ‘이 나이’에 사랑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혜니 실연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달관의 여유다. 그래서 ‘잃어버린 것’과 ‘다시 못 올 것’은 성공이거나 사랑이겠지만 그나마도 색소폰 소리를 안주 삼아 도라지 위스키(추억) 한잔 마시는 게 바로 낭만이라고 유유자적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정하다시피 그는 폭발적인 가창력의 가수는 아니다. 호흡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악보를 볼 줄 모르던 전성기의 리치 블랙모어의 거친 기타가 면도날처럼 정교한 제프 벡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폄하한 사람은 없었듯 최백호라는 가수를 단편적으로 평가해선 곤란하다.

예술은 테크닉보다 감수성이 우선시된다. 음악과 미술에선 화려한 외양보단 독창성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대중은 대중가수에게서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원하는 게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정서를 가진 친구를 간구한다.

최백호 등의 ‘선배가수’들이 젊은 가수들과 손을 잡는 배경엔 상업적 성공을 위한 목적이 당연히 깔려있기 마련이지만 최백호의 협업은 그런 단순한 이유로 치부하기엔 그가 들려준 음악의 깊이와 그가 걸어온 결코 순탄치 않았던 긴 여정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가 아이유의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에코브릿지나 주현미에게 손길을 뻗은 이유는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치는 쏠림현상에 대한 나름의 해결방편을 제시하는 선배로서의 솔선수범이다. 현재 가요산업은 아이돌그룹에 과하게 편중돼있다. 기획사의 아이돌 아니면 트로트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마치 ‘모 아니면 도’라는 도박에 가깝다. 물론 발라드나 밴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성비를 생각한다면 인디레이블이 아닌 이상 제작사 입장에선 쉬운 선택은 아니다.

최백호가 건재한 것은 의미가 크다. 그는 스타였지만 조용필이나 전영록처럼 화려한 ‘오빠’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동진처럼 통기타의 대부로 추앙받은 것도 아니며, 전인권처럼 신비스러운 레전드로 잠행한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제도권에서 활동했지만 ‘딴따라’ 이미지보단 음악이란 친구로써 자신의 낭만을 즐기면서도 자신만의 인생의 노래를 만들어 그걸 매개체로 대중과 허심탄회하고 소박하게 소통하고자 하는 몇 안 되는 가수이기에 아직도 청바지를 입고 덥수룩한 수염으로 방송에 출연하는 그가 대중은 반가운 것이다.

아이돌의 협업은 철저한 기획사의 아이디어상품이다. 아이돌그룹의 음악이 트렌드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룹의 멤버들이 펼치는 '따로 또 같이'의 동시다발형 시스템 안에서 그냥 하나 더 추가된 것 외의 큰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눈치 빠른 사람은 손쉽게 알아챌 것이다. 어차피 아이돌그룹은 오래가지 못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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