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싱글라이더>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2월 15일, 22일 각각 개봉된 영화 ‘그래, 가족’과 ‘싱글라이더’는 할리우드 메이저스튜디오가 모회사인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이하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이하 워너)가 각각 배급(이하 투자 포함)했다. 디즈니는 한국영화 첫 배급에서 쓴맛을 봤다. ‘싱글라이더’ 역시 씁쓸한 흥행성적표를 던졌지만 워너는 지난해 첫 배급 한국영화 ‘밀정’(760만여 명)으로 쏠쏠한 흥행수익을 챙기고 한국관객들에게 큰 호감이미지도 쌓았다.

20세기폭스코리아(이하 폭스) 역시 지난해 ‘곡성’(688만여 명)으로 돈과 명예를 동시에 안았다. 폭스는 ‘런닝맨’(2013)을 시작으로 총 4편의 한국 영화를 배급한 데 이어 올해 이정재 여진구 주연의 ‘대립군’을 개봉한다. 워너의 다음 한국영화 라인업은 장동건 김명민 주연의 ‘V.I.P’다.

할리우드 메이저스튜디오가 국내 극장에 그들의 영화를 직접 배급한 효시는 1988년 ‘위험한 정사’(UIP)였다. 당시 그 유명한 시네하우스 뱀 사건 등 국내 영화계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영화의 수준 및 사이즈와 영화산업의 상대적 경쟁력을 키우는 효과를 낳았다. 재벌기업의 영화계 진출로 멀티플렉스라는 문화적 공간의 진화가 이뤄졌고,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NEW, 롯데엔터테인먼트라는 4대 메이저 배급사가 자리를 잡았다.

▲ 영화 <그래, 가족> 스틸 이미지

다국적 음반기업은 이미 오래전부터 직간접적으로 한국 가요에 투자와 배급을 해왔다. 이에 비하면 메이저스튜디오의 한국영화 투자는 만시지감이 없지 않다. 과연 미국자본의 한국영화 진입은 약일까, 독일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스크린쿼터 때와 달리 우리 영화인들이 그다지 반발하지 않는다는 데서 답이 보인다. 항상 음반업계에 비해 시스템이 한발씩 늦었던 영화계는 19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예전의 제작자가 돈을 책임지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투자배급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가요계는 이미 1980년대 ‘PD메이커 시스템’이라는, 기획제작과 투자배급이 분리된 구조가 자리 잡았다.

영화계의 투자배급 안정은 자본운영의 투명성을 가져와 시장시스템을 건강하게 만들었다. ‘검은돈’이 사라지고 인건비와 작업환경이 정상화를 향해 진일보했다. 현재 크레딧이 부족하거나 목소리에 힘을 낼 수 없는 군소제작사의 경우 프로젝트를 배급사에 거의 강탈당하다시피 지분을 빼앗긴다는 볼멘소리도 있긴 하지만 대형배급사가 감독과 스태프의 숨통을 틔워주고 배우에게 활동의 장을 활발하게 꾸며준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물론 관객에겐 선택의 다양성을 주기도 한다.

▲ 영화 <대립군(가제)> 촬영 현장

대기업이 영화산업을 장악하고 예술영화의 숨통을 옭죈다는 불만이 없지 않지만 자본주의에서 소수의견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묵살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할리우드 메이저스튜디오의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와 배급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다만 직배를 반대하는 뱀 사건, 단체삭발시위 등 유독 한국영화인들의 자존감이 강해 눈치를 봤을 뿐이고,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영화계의 파이가 커졌으며, 한류열풍으로 자본의 ‘혼혈’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당당하게 숟가락을 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냉정하게 ‘빅4’가 토종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롯데에 대해선 아직도 지식인들 사이에선 일본기업이란 이미지가 강하고, NEW에는 중국 자본이 꽤 많이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김윤석 주원 유해진 등이 소속된 심엔터테인먼트는 아예 중국자본이 사들여 화이브라더스라고 사명까지 변경했다. 이렇듯 국내 엔터테인먼트업계에는 이미 깊숙이 중국 자본이 침투한 지 오래다.

▲ 영화 <그레이트 월> 스틸 이미지

미국 자본의 영화계 진출은 쌀이나 소고기 수입 개방 등과 같은 양날의 검이다. 개개인의 영화인에겐 기회가 주어지지만 영화관련 기업에겐 파이의 나눠먹기 같은 밥그릇 다툼이 더욱 치열해진다는 의미다. 민족적 차원에선 문화잠식의 우려가 크다. 그 예가 최근 개봉된 ‘그레이트 월’이다.

이 영화는 중국과 미국이 합작하고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픽처스가 국내에 배급했다. 중국의 대표 랜드마크인 만리장성이 무대이자 소재인데 철저하게 만리장성을 가렸다. 중국 제목조차 ‘장성’이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장성도 실제 만리장성이 아니라 세트에서 찍었다.

감독은 중국을 대표하는 장이머우고, 맷 데이먼과 함께 징텐 류더화 등이 주요 배역을 맡았다. 서양 무사들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폭발물을 취득하고자 중국에 왔다가 중국을 집어삼키고 전 세계를 몰살시키려는 괴물들과 맞서 싸우며 중국을 구한다는 황당한 내용이다. 국내에선 흥행에 참패했다.

▲ 영화 <그레이트 월> 스틸 이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은 분명 증폭시켰을 것이다. 전 세계 관객들에게 만리장성 및 중국 관광의 의욕을 부추길 것이다. 영화의 재미나 완성도 따윈 상관없다.

국내에 들어온 중국자본의 중국의 찬양이나 미화 작업의 움직임은 아직 없다. NEW가 제작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무대는 우르크라는 그리스 혹은 이라크 등을 모델로 한 가공의 국가였을 뿐 중국에 관련된 내용은 삿갓배미만큼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할 노릇은 아니다. 주식회사의 사업방향과 기업정신은 자본주가 만들 듯 국내영화에 돈을 대는 할리우드가 마냥 ‘키다리아저씨’이진 않을 것이 명약관화하다. 할리우드 영화에 그 답이 있다.

▲ 영화 <싱글라이더> 스틸 이미지

‘에어포스 원’이나 ‘인디펜던스 데이’에선 미국 대통령이 영웅적 활약으로 지구평화를 지킨다. 슈퍼맨 배트맨 등 각종 맨들은 모두 미국을 거점으로 활약하고 미국식 영어로 말한다. 언젠간 ‘곡성’이 아니라 ‘필라델피아’나 ‘보스턴’이 ‘메이드 인 코리아’로 제작될 것이다. ‘싱글 라이더’에선 호주가 배경이었지만 나중엔 샌프란시스코 골든 게이트 브릿지에서 찍는 한국영화가 나올 것이다.

물론 마냥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미국은 자본주의가 이념을 통제하는 지구촌의 실질적 리더를 자처하고 할리우드는 그 표본이다. 그들이 ‘곡성’이 가진 심오한 메시지나 ‘밀정’이 은근히 세뇌하는 애국심 고취 사상을 보고 돈을 댄 건 아니다. 시나리오가 가진 완성도부터 시작해 할리우드식 계산법으로 촘촘하게 계산기를 두드린 끝에 지갑을 연 것이다.

한류열풍이 입증하듯 우리 국민의 문화적 강점과 변별성은 분명하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거울 속으로’ ‘시월애’ 등 수많은 한국영화를 할리우드가 리메이크한 데서 보듯 우리 문화의 경쟁력은 확실하다.

▲ 영화 <거울속으로> 스틸 이미지

할리우드의 밀려드는 자본은 바로 그 개성을 지키고 개발하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한국영화계를 ‘꽃길'로 인도할 수도, ‘흙길'로 끌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풍요로운 자본에 도취해 안일한 자세로 단순히 당장의 돈에만 눈이 멀어 소비성 강한 오락물만 만들어낸다면 어느새 할리우드가 명령하는 미국정서에 사로잡힌 국적불명의 영화 일색이 될 것이고, 그건 할리우드 영화들이 집착하는 미국식 제국주의의 의식화에 발을 맞추는 열병식이 될 것이다.

3대국제영화제인 베니스 칸 베를린이 한국 여배우에게 여우주연상을 준 영화는 모두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국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로케이션으로 찍었다. 식자들은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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