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원라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대표적인 멀티캐스팅의 케이퍼 무비(하이스트 필름)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일 것이다. 한국은 제작사 이름조차 아예 케이퍼 필름인 최동훈 감독의 대표작 ‘도둑들’이다.

범죄영화의 하위 장르인 케이퍼 필름은 범죄인들이 주인공이 돼 범죄를 통해 목적(주로 돈)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는 한편 막바지에 통쾌한 반전을 필수적으로 삽입해 관객들의 뒤통수를 때림으로써 재미를 극적으로 끌고 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두 주인공이 티격태격하며(코미디) 범죄(액션)를 저지르는 버디 무비와 케이퍼 무비의 장르적 공식을 제시한 조지 로이 힐 감독의 걸작 ‘내일을 향해 쏴라’(1969)는 케이퍼 무비의 본격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부치 캐시디(폴 뉴먼)와 더 선댄스 키드(로버트 레드포드)가 연쇄 은행 강도질 끝에 군대에 포위되자 총알을 쏟아 붓는 군대의 한 가운데로 달려 나가는 마지막 정지화면은 아직도 마니아들의 가슴 한 구석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 영화 <스팅> 스틸 이미지

‘정무문’(1972)에서 일본군에 포위된 리샤오룽(이소룡)이 쏟아지는 총탄을 향해 날아오르는 장면은 아무래도 그것의 오마주 혹은 최소한 레퍼런스로 여겨진다. 힐 감독은 1973년 두 배우를 그대로 기용해 두고두고 영화사에 남을 케이퍼 무비의 전설 ‘스팅’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 ‘타짜’부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기술자들’까지 죄다 21세기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신예 양경모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장편상업영화 첫 연출작 ‘원라인’(NEW 배급)은 외형상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먼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케이퍼 무비의 공식에 충실하다. 주, 조연을 구분하기 힘들 만큼 꽤 많은 주요 캐릭터에 각자 서운하지 않을 만큼 비중을 부여한 뒤 그들의 정체성이 선인지 악인지, 혹은 적인지 동지인지 등이 헷갈리게끔 다양하게 변주한다.

▲ 영화 <원라인> 스틸 이미지

그러면서도 한국적 상황과 정서 그리고 문화를 녹였다. 할리우드 영화는 주로 은행을 털거나, 부자의 뒤통수를 치거나, 아니면 아예 정부나 절대 권력자와 맞서지만 그건 미국식 정서다. ‘원라인’은 철저하게 은행으로 은유된 돈 혹은 체제와 싸운다는 점에서 차별화의 길로 나아간다.

2005년. 대학생 민재(임시완)는 전형적인 ‘흙수저’보다도 못한 아주 심한 ‘진흙탕수저’다. 돈이 절실한 그는 ‘작업대출’ 베테랑 사기꾼 장 과장(진구)을 통해 은행에서 3000만 원을 대출받는 데 성공한다. 장 과장에게 수수료 900만 원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친구 해선(왕지원)과 혁진(박유환)의 도움으로 그를 속이고 3000만 원을 고스란히 챙긴다.

하지만 해선은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처럼 민재에게서 그 돈을 사기 쳐 도망가고 민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장 과장 팀에 합류한다. 그 조직엔 장 과장의 친구인 사채 건달 출신 박 실장(박병은), 매사에 S대 출신임을 강조하는 서류조작 담당 송 차장(이동휘), 개인정보 수집 담당 홍 대리(김선영) 등이 있다.

▲ 영화 <원라인> 스틸 이미지

‘민 대리’라는 가명을 쓰는 민재는 타고난 수완으로 뛰어난 실적을 올린다. 그러면 그럴수록 박 실장과 송 차장의 시샘은 노골적인 견제와 배타로 발전한다. 그 즈음 사기대출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검찰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경찰 등은 각각 한 명씩 직원을 파견해 특별수사팀을 꾸린다.

원규철 검사(조우진)는 하루 종일 컴퓨터게임이나 하고, 재경부 직원은 골프채만 휘두를 뿐 “1년만 버티자”는 전형적인 ‘직무유기 낙지형’ 공무원의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천주환 형사(안세하)는 다르다. 다혈질에 소신감 넘치는 그는 고생 끝에 ‘민 대리’의 실체에 접근하며 민재의 숨통을 죄어가는 가운데 드디어 장 과장의 사무실을 알아내 급습한다.

간신히 도망친 장 과장은 “잠수를 타겠다”며 조직 해체를 선언하고, 박 실장은 나머지 멤버를 이끌고 독립한다. 민재 역시 독립하겠다며 장 과장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가 가진 고객명단을 받아낸다. 장 과장은 장부를 넘기며 “3D대출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3D대출이란 고객의 자동차 전세금 보험금 등을 담보로 한 사기대출이다.

▲ 영화 <원라인> 스틸 이미지

그러나 돈에 눈이 먼 민재는 장 과장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한 질주하는 가운데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부상한다. 그 사이 박 실장은 은행권과 결탁해 유력 은행 하나를 인수하는 작업을 진행하지만 장 과장 인맥인 금융감독원의 ‘하나님’의 반대로 번번이 벽에 부닥친다. 그래서 그는 민재와 장 과장을 한꺼번에 파멸시키려 하는데.

현대 경제범죄 중 매우 무서운 것 중 하나는 주가조작(‘작전세력’의 ‘작업’)과 이를 통한 부당한 M&A, 그리고 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뇌물 등이다. ‘원라인’은 주가조작 대신 서류조작을 통한 사기대출이라는 ‘작업대출’을 소재로 했다는 데서 신선하다. 게다가 주가조작보다 훨씬 더 쉽게 설명함으로써 몰입도와 현실감을 높인다.

“은행은 갚을 수 있는 놈에게만 돈을 빌려 준다”는 한 마디는 이 영화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사람은 그만큼 각박하고 절박한 상황일 텐데 정작 은행은 담보나 고정수입이 없는 사람에겐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그래서 영화는 ‘은행은 돈 놓고 돈 먹기를 하는 이자사업 기업일 뿐’이라고 대놓고 비꼰다. 그건 은행 자체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정책이 없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다.

▲ 영화 <원라인> 스틸 이미지

장 과장은 과욕을 부리는 민재에게 “자제할 줄 모르면 인간처럼 안 보여”라고 경고한다. 민재는 수천만 원이 없으면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넘치는 은행 돈을 대출해주고, 자신은 수수료를 챙기는 건 죄가 안 된다는 위험한 의식을 갖고 있다. 과연 민재가 법정신을 모르고 도덕과 질서의식이 결여돼있기 때문일까?

민재는 천 형사에게 선천적으로 신장이 약한 탓에 아버지로부터 2번이나 이식수술을 받았고, 그래서 빚투성이가 돼 집안 꼴이 엉망이 됐다며 “빚을 갚으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끝이 안 보인다. 절대 못 갚는다. 그래서 나는 빚진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고 외친다.

영화의 저변에 흐르는 비판의식 중 외모와 학벌 지상주의에 대한 조롱도 눈여겨볼 만하다. 공무원의 무사안일주의와 ‘낙지부동’ 자세도 소소한 재미를 제공한다. 그래서 범죄자들은 “우리는 인간답지 않은 일을 인간답게 한다”며 합리화하려는 얄팍한 방어 기제를 발동하고, “더 많이 가진 놈이 그 뒤에서 나쁜 짓을 더 한다”며 사회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

▲ 영화 <원라인> 스틸 이미지

대사의 단어나 어휘에서 그렇게 차지거나 눈이 번쩍 뜨이는 촌철살인의 테크닉은 돋보이지 않지만 곱씹을수록 여운이 길고 깊다. “돈을 엄청나게 벌면 이 불행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그렇지 않다)” “(작업대출은 결국)남을 도와주는 게 아냐.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라는 민재의 대사는 정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감독은 ‘돈이 뭐기에 자살하는 개미를 양산할 정도로 인간성이 말살된 풍토가 만연하는지’ 호통치고, ‘제발 사람답게 살자’고 호소하는 듯하다.

131분이 좀 길긴 하다. 감독의 과욕이 중간지점에서 흐름을 끊긴 하지만 후반부의 긴장과 재미는 그 인내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최근 국내외의 케이퍼 무비가 상업성 일변도로 내달렸다면 ‘원라인’은 그 재미에 카타르시스를 더하고, 동화의 미덕을 추가하며, 이 사회와 체제에 대한 비판의 자성을 덤으로 얹는 가운데 소설 ‘홍길동’의 탄생 배경과 작가 허균의 질곡의 삶과 개혁사상을 묻는 듯하다. 15세 이상 관람 가. 3월 2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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