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홍상수 감독이 연출하고 김민희가 주연한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두 사람의 열애가 거의 기정사실화된 이후 그들이 함께한 첫 영화다. 여배우 영희(김민희)가 영화감독(문성근)과의 불륜으로 고뇌하고 아파하는 가운데 주변사람들이 ‘영희는 예쁘고 재능이 아까운 배우’라는 결론을 내려 마치 두 사람의 사랑을 설득하고, 섭외중단이 우려되는 김민희의 배우로서의 값어치를 웅변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는 ‘의심’이 화제를 더욱 부추긴다.

우여곡절 끝에 23일 개봉됐지만 화제성과 달리 이전 홍 감독 영화의 흥행성적에서 크게 새로울 게 없다. 각 매체에 두 사람이 거론될 때마다 댓글은 대부분 비난하는 논조다. 아예 그들의 기사를 더 이상 안 봤으면 좋겠다고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누리꾼도 꽤 있다. 그러나 댓글 숫자로 봤을 때 관심(혹은 적대감)은 큰 게 확실하다.

2015년 간통죄가 폐지됐으니 그들의 사랑은 불법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이 판단하는 ‘도덕법’에 비췄을 땐 불륜이다. 우리나라는 법률(민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른 신고로 혼인의 성립이 인정되는 법률혼주의를 취한다. 혼인신고를 한 홍 감독과 아내의 사이엔 딸까지 있다. 누가 뭐래도 홍 감독과 김민희가 벗어날 수 없는 ‘죄질’이다.

▲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스틸 이미지

그래서 홍 감독은 협의이혼이 아닌-아내는 남편이 돌아올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했고, 만에 하나 그런 척하는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소송을 선택했다. 법조계에선 ‘현재로선 혼인관계를 흔든 귀책사유가 홍 감독에게 있다는 게 보편적 시각인 이유로 홍 감독이 승소하려면 자신의 부정행위보다 더 큰 부인의 귀책사유 혹은 쌍방귀책을 입증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홍 감독은 1960년생이고, 김민희는 1982년생이다. 여자들의 결혼적령기가 어느덧 30대로 넘어간 현 추세에 비춰볼 때 김민희는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다. 홍 감독은 아무리 해외에서 인정받는 영화감독이라지만 나이차이나 유부남이란 위치는 그리 유리한 조건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작고한 어머니로부터 꽤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저출산율 이혼율 1위라는 뉴스는 이제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그 이유가 서민의 삶의 질이 최악의 수준으로 급락하고 있기 때문이란 얘기도 귀가 따갑다. 결혼풍습은 우리의 미풍양속이자 성스러운 약속이며 필수적인 종족보존의 책임이었지만 21세기 들어 이게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인식이 계속 느는 배경이다. 그런 상황인지라 홍 감독과 김민희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에서 천박한 자본주의적 계산법에서 비롯된 질시가 전혀 없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배제하기 쉽지 않다.

▲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스틸 이미지

물론 그들을 옹호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다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이기적이고 아전인수 격인 편견이나 방어기제에 대한 의문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이 무수한 현실을 외면하기 힘들다. 장애인이란 단어조차 비하적인 표현이라고 해서 장애우로 바꿨다가 편견만 키운다며 다시 장애인으로 회귀한 문화에서 그게 없다고 자신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순수한 우리말인 ‘다르다’는 올바른 표현조차 ‘틀리다’고 그릇되게 말하는 왜곡이 팽배한 언어습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는 '도제시스템'과 토론이 없는 일방적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우리 국민 다수에겐 타성에 젖은 개념에서 어긋나면 다른 걸 인정하지 못하고 그릇된 것으로 우기는 습성이 남아있다. 지구촌 사람이 모두 모이다시피 하는 세계적인 한국에서 외국인이 지나가면 한 번 더 쳐다보는 한국인을 아직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청소년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큰 유명 감독과 스타라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엄연히 행복추구권리가 있는데 타인이 지나치게 ‘내정간섭’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지만 불법은 사법부가, 부도덕은 사회의 유기적 흐름이 단죄한다. 그들 때문에 기분이 나쁠지라도 직접적인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관심 쏟을 시간을 아껴 가족과 생계를 걱정하는 게 더 수지타산에 맞다.

문제는 사랑이라는 사람만의 축복이자 특권이며 변별성인 천변만화의 감정이다. 홍 감독은 아내와 30년 전에 결혼했다. 연애결혼인 듯하다.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그 터질 듯한 도파민과 세로토닌으로 불붙은 그들은 뜨겁게 연애를 했고, 그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으로 믿었기에 결혼해 딸이라는 결실도 얻었을 것이다.

▲ 영화 <봄날은 간다> 스틸 이미지

인터뷰에 의하면 홍 감독은 이제 김민희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아내는 아직도 남편을 사랑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이영애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울먹였지만 사랑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변하기 마련이다. 굳이 멀리 홍 감독의 변심을 째려볼 필요 없이 가깝게 부모에게 ‘아직도 사랑하냐’고 물어보면 답이 있다. ‘어른’들은 ‘사랑으로 사냐? 정으로 살지’ 혹은 ‘자식 때문에’라고 체념한 듯 말하지만 이혼율은 그렇게 답하지 않는다. 여전히 금슬이 좋은 노부부가 뉴스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확률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편협한 사람들이 착각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보수’와 ‘진보’가 적이라며 굳이 편 가르기로 싸우려 드는 것이다. ‘보수’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치 있는 전통과 미풍양속을 지키자는 것이고, ‘진보’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에 맞춰 자연스레 발전적으로 개선하자는 것이다.

1970년대의 영화만 해도 신혼부부의 첫날밤 최측근들이 신방 문의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엿보는 게 풍습이었지만 지금 그러면 심각한 범죄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 중 그걸 미풍양속이라며 지키자고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당장 입고 있는 옷을 벗어 한복으로 갈아입을 것이며 휴대전화도 내팽개친 채 이웃 텃밭에 서리(예전엔 장난, 지금은 절도)라도 하러 갈 일이다. 물론 무조건 ‘어른’들을 구닥다리라며 무시하는 소수의 ‘진보’는 나중에 후손들로부터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는 대립각이 아니라 2인3각이어야 건강한 사회다.

사랑이 그렇다. 불과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유독 여자에게 혼전순결이 강요됐고, 50년 전만 해도 혼전임신이 부도덕한 행위였지만 최근 10년 새 결혼하는 스타라고 하면 으레 혼전임신이 당연한 ‘혼수’인 듯 비치고 있으며 그걸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사랑과 결혼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아니 바뀐 것이다. 저출산율이 더 심화되면 임신한 채 결혼하는 스타를 출산홍보대사로 임명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홍 감독과 김민희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많은 사람들의 요즘 화두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그냥 영화로 볼 것이냐, 아니면 홍 감독의 자전으로 취급할 것이냐다. 물론 당사자들은 당연히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해석도 관객 각자의 몫이다. 단, 어떻게 바라보든 두 사람에 대한 비난은 홍 감독의 가족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그들과 대중 모두의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점이다.

그렇잖아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의혹과 오래 걸린 세월호 인양에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남의 지극히 사적인 은밀한 ‘관계’에까지 신경 쓰는 건 지나친 소모전이다. ‘어른’들은 다 안다. 사랑, 그까짓 것 지나고 나면 다 별거 아니라는 걸. 결국 사람은 나중에 다 ‘밤(인생 끝)의 해변(스틱스-저승의 강, 혹은 여신-강변)에서 혼자’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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