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1989년 출간된 시노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는 1995년 오시이 마모루 감독에 의해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개봉돼 영화계에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단순한 성인용 만화영화가 아니라 SF계의 철학교과서였다.
뤽 베송은 영감을 얻어 ‘제5원소’를, 워쇼스키 자매는 모티프를 얻어 ‘매트릭스’를 각각 만들었다고 공공연하게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A.I.’를 비롯한 수많은 화제의 SF영화들이 ‘공각기동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고개를 가로저을 순 없을 것이다. 그만큼 앞서갔으며 심오하다.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의 루퍼트 샌더스 감독이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 실사판으로 만든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은 스칼렛 요한슨이란 액션 섹스 심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슈퍼히어로 액션 장르 하나를 추가하는 가운데 오시이를 오마주하는 형식적 예의를 잃지 않은 오락물이다.
사람들의 신체가 의체로 대체되고 심지어 뇌조차 전뇌를 이식해 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게 된 미래. 총리는 네트워크 테러에 맞서 부대 섹션9을 창설했고 생체-로봇 관련 첨단기업 한카로보틱스와 공조하도록 체계를 만들어 놨다.
한카의 오우레(줄리엣 비노쉬) 박사는 난민보트에서 부모를 잃고 온몸이 망가진 채 간신히 뇌만 살아있는 메이저를 구해 강력한 의체를 제공함으로써 ‘부활’할 수 있게 해준 창조주 같은 존재다. 메이저는 1년 후 9을 이끄는 여전사가 된다.
알 수 없는 테러조직이 한카의 임원과 박사들을 차례로 살해하자 메이저는 파트너 바토(필로우 애스백)와 출동해 사건을 해결하던 중 네트를 통해 쿠제(마이클 피트)라는 의문의 인물과 접촉하게 되고, 그가 우두머리임을 직감해 추적한다.
그녀는 뇌와 의체와의 유기적인 합체를 위해 한카가 준 약물을 주기적으로 주입하도록 돼있는데 어느 날부턴가 환영이 보이기 시작해 오우레에게 의논하지만 그녀는 뭔가 숨기는 듯한 눈치다. 메이저는 서서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한카의 우두머리 커터는 노골적으로 9 조직에 간섭한다.
결국 커터의 음모로 메이저는 쫓기는 신세가 되고 9의 수장 다이스케(기타노 다케시)와 커터는 정면대결을 선언한다. 그러나 커터의 부하들이 다이스케가 탄 차에 집중포화를 쏟아 붓고 9과 메이저는 고립무원의 위기에 처한다. 그 사이 메이저는 자신의 과거의 비밀의 열쇠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오우레로부터 받고 외곽지역에 들렀다가 드디어 쿠제를 만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실사판은 ‘어벤져스’의 블랙 위도우의 상대적으로 약한 활약상에 허기를 느꼈을 요한슨 팬들에겐 최고의 액션오락물이 될 것이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가 혼재된 도시의 비주얼은 참으로 눈을 호강하게 만든다. 기상천외한 홀로그램과 조명이 마천루와 기이한 구조의 도로 등과 뒤엉켜 화려함을 뽐낸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보단 밝지만 거리를 오가는 군상과 유기견들에게선 희망 대신 암울한 미래와 혼란스러운 정체성이 엿보인다.
샌더스는 재미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오시이에 대한 존경심도 유지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화이트 워싱’ 논란을 의식해 일본영화의 중추신경 기타노를 비롯해 꽤 많은 일본 캐릭터를 배치했으며 특히 기타노에게 영어가 아닌 일본어를 그대로 구사하도록 배려했다.
‘블레이드 러너’가 홍콩과 일본을 뒤섞었다면 이 영화는 철저하게 일본식이다. 원작의 견종을 그대로 유지했고 최고의 명장면인 쿠사나기 소령의 고층빌딩 옥상에서의 낙하 침투 장면 역시 원작에 가깝게 그렸다. 빗물이 얕게 고인 폐허에서의 격투 신도 원작에 충실했고, 스파이더 탱크와의 최후의 결전은 훨씬 발전했다.
한 마디로 슈퍼히어로(부대)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비긴즈’가 연상되는 이 영화는 철저한 오락물로서의 재미를 보장한다. 그러면서도 원작이 워낙 심오한 철학서인지라 조심스레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9은 메이저를 소중한 동료로 여기지만 한카는 ‘무기이자 변화’라고 인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정체성의 문제가 출발하고 이를 메이저의 기억의 혼돈으로 연결한다. 잊힌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던 메이저는 흑인 창녀의 가면과 화장을 벗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며 “너 인간이니?”라고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 즉 밀착된 인간관계에 대한 그리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뇌만 사람의 것일 뿐 모든 신체가 기계다. 물론 피부도 인조다. 과연 그녀는 사람일까, 로봇일까? 초반의 “기억은 우릴 정의하지 않아”라는 대사는 결말과 주제를 암시한다. 사람들에게 기억은 매우 중요하다. 기억은 과거지만 뇌가 기억하는 요소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감정만 과거일 따름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복습을 통해 기억과 정보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사람은 주입된 기억의 3분의2를 24시간 내에 잃어버릴 위험에 노출돼있다. 독일 철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이론이다. 과연 메이저의 망각곡선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필립 K. 딕의 소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토탈 리콜’(1990)은 독재자가 통치를 위해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내용으로 폴 버호벤 감독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장자’의 ‘제물론’은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난지’라는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꿈과 현실의 혼돈을 통한 철학을 설파했고, ‘토탈 리콜’에 이어 ‘공각기동대’에 이어졌으며, 다시 ‘매트릭스’에 강렬한 영감을 줬다.
커트 위머 감독의 영화 ‘이퀄리브리엄’(2002)에서 독재자는 전 국민에게 매일 감정통제의 알약을 먹임으로써 국가를 지배한다. 메이저가 주입하는 약은 뭣일까? ‘이퀄리브리엄’은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는 비결정론 즉 균형설이다.
원작의 쿠사나기 소령은 바다에 뛰어드는 이유가 “새로운 나에 대한 희망”이지만 실사판의 메이저는 “누굴 믿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바다 속은 진짜 같아서”다. 바다는 자궁과 ‘정보의 바다 네트’의 중의적 의미를 띤다. 사람은 자궁의 양수에 잠긴 채 머물다 태어난다. 바다는 지구의 생명체가 시작된 곳이며, 그 중에서 허파호흡으로 진화한 생명체가 육지동물이 됐고, 그 중에서 인류의 조상이 나왔다는 이론이다. 현대 정보의 바다는 바로 ‘공각기동대’의 네트다. 영화 ‘론머맨’(1992)에서 신체장애 청년은 가상현실체험의 실험대상이 됐다가 아예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 세계를 지배하는 괴물이 된다. 바다도 네트도 탄생의 자궁인 것이다.
이 점에서 실사판은 확실히 오리지널에 비해 한 수 아래다. 원작에서 인형사(쿠제)는 자신을 생명체로서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너희들의 유전자도 자기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하지.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생긴 결정체 같은 것일 뿐. 인간은 유전자라는 기억 시스템을 통해 개인이 되는 거야. 기억이 환상이라 해도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원작의 인형사와 쿠사나기의 융합에 의한 변이는 니체가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로 표현한 ‘주권적 저항’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대해 “극도의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적 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존하지 말고, 오직 인간의 자기초월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선 실사판은 오리지널을 따른다. 니체의 인간을 메이저와 쿠제라는 인간 혹은 A.I.로 대체하고, 두 ‘생명체’는 초인(超人-사람을 뛰어넘어)이 되거나 아예 초극(超克-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의 존재가 됨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희망을 향해 약진한다. 원작의 트럭운전수나 실사판의 테러리스트가 조작된 기억으로 아내와 딸의 존재를 착각한 것은 바로 ‘A.I.’가 예견한 인류의 멸종의 조짐이지만 결국 실낱같은 희망을 쓴다.
실사판에서 확실히 니체는 윤색됐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가 가진 르상티망(원한, 복수감)의 분출로 인한 신세계의 재편이란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107분. 15세 이상 관람 가. 3월 29일 개봉.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