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정지윤의 청춘 넋두리]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급식을 먹었기에 느끼지 못했다. 어쩌다 소문으로 “쟤네 집 완전 잘 산대.”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 아이도 나와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옷을 입은 채로 공부를 하니까.

대학에 들어와서야 나는 처음으로 모두가 나와 똑같은 삶을 산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학에는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특히, 외국에 오래 살다와 현지 언어를 유창하게 하고 방학마다 유럽 여행을 훌쩍 훌쩍 떠나는 동기들의 모습은 지방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월 30만원으로 시작한 나의 자취생활은 다행히 소비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는, 어쩌면 다행인 나의 무덤덤한 성격 덕분에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가끔은 철저하게 1000원까지 계산을 해가며 끼니를 때워야하는 고비에 부딪힌다. 돈이 넉넉해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통장을 보면 가슴이 초조해질 만큼 잔액이 얼마 남지 않곤 했다.

친구들이 만 원 이상의 비싼 음식점을 가려 할 때면 나는 혼자서 재빨리 저걸 먹으면 나중에 생활비가 빠듯해지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야 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6000원 짜리 요거트 스무디도 어느 순간 큰 맘 먹고 사서 먹어야 하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처음으로 서울에 혼자 올라와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는 ‘수저’의 존재를 알아버렸다. 요즘 대학생들이 많이 쓰는 ‘금수저’, ‘흙수저’ 하는 말이 나에게도 현실로 다가 온 것이다.

사소한 물건을 살 때도 금전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나에게 자연스레 아무 걱정 없이 돈을 쓰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살지 않을까? 요즈음 학교 게시판 어딜 가나 ‘금수저’에 대한 얘기가 끊이지 않았기에 나도 자연스레 나의 수저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진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갑자기 다가온 현실의 벽이 부모님을 수저에 비유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꿋꿋이 잘 살고 있다가도 한 번씩 돈 때문에 하루가 허탈해지면 ‘나는 왜 금수저가 아닐까?’ 하며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몇 만원으로 몇 주를 버텨야할 때면 ‘왜 엄마는 용돈을 이거밖에 안 주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나고 잠자리에 누우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러다가도 신기하게 한바탕 울고 나면 다시 씩씩하게 생활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선 우스웠던 적이 몇 번 있다.

가끔 걸려오는 부모님의 전화에서 엄마 아빠는 항상 용돈이 부족하지 않냐고 묻지만 나는 한 번도 부족하다고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 전화를 해서 ‘못해줘서 미안하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미안하다’라는 말로 끝내며 횡설수설 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그저 ‘괜찮아요’ 라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투정을 부리기엔 나는 너무 커버렸고 부모님은 많이 연약해지셨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많은 청춘들이 부모님 앞에서 씩씩한 척 할 것 이다. 정작 학교 앞 음식점에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을 정도로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생활하는 청춘들이 많다.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도 물가에 내놓은 애 마냥 항상 걱정하고 미안해하는 그들을 그저 ‘수저’라는 한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

금수저가 아니어도 청춘들은 알아서 꿋꿋이 버티며 살아간다. 그리고 저마다의 수저를 만들고 있다. 그게 꼭 금, 은일 필요가 있을까?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부러지지 않는 강철 수저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대왕 수저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나는 열심히 나만의 수저를 만들며 원래 해오던 것처럼 엄마 아빠 앞에서 씩씩한 자식이 되고 싶다. 부모님을 결코 ‘수저’ 로만 부르기엔 그들에게 받은 것은 무한하고 조건 없는 것들이다. 그저 나는 나중에 부모님 앞에 나타나 자랑스레 내가 만든 수저를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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