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5일 개봉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시간위의 집’(임대웅 감독)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선 국내에서 보기 드문 오컬트 흥행작 ‘검은 사제들’과 그것의 원조 격인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오컬트 걸작 ‘엑소시스트’(1973)까지 거론된다. 뭐가 같고, 다를까?

‘시간위의 집’의 무대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 장교가 살았던 적산가옥. 해방 뒤 여러 가족이 거쳐 갔고, 1982년 전남편과 사별한 미희(김윤진)가 아들 효제를 데리고 철중과 재혼하면서 매입해 둘째 지원을 낳고 10년째 살고 있다.

집에선 이상한 일들이 계속 발생한다. 정체 모를 ‘그들’이 나타나 가족의 주위를 맴돌며 공포로 몰더니 급기야 지원이 원인 모를 익사로 떠난다. 남의 자식 효제가 눈엣가시였던 철중은 효제 탓에 지원이 죽었다며 미쳐가고, 그렇게 미희와의 갈등의 골은 마냥 깊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미희가 어떤 충격에 의해 기절했다 깨어나니 철중은 누군가의 칼에 찔려 죽어있고, 눈앞에서 효제가 지하실의 폐쇄된 벽 안으로 사라진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의 살인죄가 확정돼 25년을 복역한 뒤 그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아들을 찾고자 ‘그들’과 사투를 벌이다가 납득하기 힘든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3분의2는 오컬트 장르의 외형이다. ‘검은 사제들’을 연상케 하는가 하면 ‘그 집’에 사는 ‘그들’은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디 아더스’에 등장하는 ‘다른 것들’과 연계된다. ‘그 집’의 주인은 미희의 가족이지만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곳에 살았고, 그래서 마치 미희 가족을 쫓아내려는 듯 공포를 주거나 심지어 위협한다. ‘디 아더스’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남편을 잃은 뒤 희귀병에 걸린 두 딸을 데리고 ‘그 집’에서 살아가는 그레이스(니콜 키드먼)와 유사하다.

‘검은 사제들’의 기둥줄거리는 소녀의 몸에 깃든 악령을 쫓아내려는 두 신부의 악전고투 구마의식. 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기독교 포교이자 일부 교계 기득권자를 살짝 비트는 풍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제는 이신득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다. ‘콘스탄틴'의 매번 하느님에게 툴툴거리며 줄담배를 피우다 폐암에 걸렸고 지옥행이 예약된 콘스탄틴이 희생정신을 발휘해 자매의 생명과 영혼을 구한 뒤 자신도 구원을 받자 담배를 끊고 진정한 믿음을 갇게 되는 것처럼 최 부제(강동원)는 악령을 물리치고 멀쩡하게 살아난다.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탄압하던 로마제국에서 306년 황제에 등극한 뒤 죽으면서 기독교를 인정하고 개종한 대제 콘스탄티누스의 영어식 이름이다.

▲ 영화 <검은 사제들> 스틸 이미지

‘검은 사제들’은 ‘엑소시스트’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두 명의 신부가 소녀의 몸에 들어간 악령을 쫓는다는 뼈대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제와 메시지와 결말은 많이 다르다.

늙은 신부 메린과 젊은 신부 카라스가 리건에 몸에 들어간 고대 중동의 악령을 쫓는 엑소시즘을 하다 오히려 위기에 몰린다. 결국 메린은 죽고 악에 받친 카라스는 악령에게 자신에게 들어오라고 도발한 뒤 진짜 그렇게 되자 창밖으로 몸을 날려 자살함으로써 소녀를 구원한다.

최 부제는 어린 시절 대형견의 공격으로부터 여동생을 구하지 못한 채 그녀의 죽음을 지켜봐야했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동생을 살리지 못한 것과 더불어 그래서 천국에 가지 못한 동생에 대한 죄책감은 물론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란 두려움 탓에 믿음의 외곽에서 서성대는 나약한 인물이다.

카라스의 트라우마는 돌보지 못하고 임종마저도 지켜보지 못한 노모에 대한 죄책감이다. 악령은 계속 그런 약점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어머니로 변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기독교는 동물에 물려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지 않는다. 과연 카라스의 죽음은 콘스탄틴 같은 순교(희생)일까, 아니면 비겁한 자살일까?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 이미지

이런 차이점에서 ‘시간위의 집’은 살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SF 걸작 ‘인터스텔라’에 접근한다. ‘인터스텔라’의 주제는 가족의 사랑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약속이 인류의 희망이라는 것.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는 시간과 공간이다. 과거와 미래의 아주 먼 두 공간을 5차원을 통해 연결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인류라는 종을 생존케 할 수 있는 희망은 그들이 찾아 헤맸던 항성간(인터스텔라)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사람의 사랑 안에 있다고 웅변한다.

‘시간위의 집’이 ‘인터스텔라’와 닮은 점이다. 미희가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도 25년간의 옥고와 그보다 더 아픈 아들 실종의 아픔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생명력은 모성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철중이 미희에 대한 애정이 식고, 죄 없는 효제에 대한 미움이 가중된 근원 역시 지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었다. 이 비극 사이에서 더욱 큰 참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제와 지원은 이복형제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우애를 나눴다는 점 때문에 효제가 가진 아픔이다.

▲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 이미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우주공간에 나아간 아버지 쿠퍼를 기다리는 딸 머피는 이전에 자신의 방에 출몰하곤 했던 ‘귀신’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뭔지 골몰한다. 결국 ‘그’는 다름 아닌 미래에서 5차원을 통해 날아온 쿠퍼였고, 애절한 그 부성애가 인류를 구하고 머피도 구한다.

쿠퍼는 막막한 우주공간에서 80년간 아들과 딸을 그리워하며 애간장을 태운다. 미희는 고작 25년이지만 아들이 실종됐다는 게 그녀만의 더 큰 아픔이다. 쿠퍼에겐 5차원의 미래의 인류의 도움이 있지만 미희는 혈혈단신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수다. 최 부제나 카라스는 1‘명’과 싸웠지만.

‘엑소시스트’는 사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당시의 미국 사회상을 담은 영화다. 의사가 정체불명의 병에 걸린 리건을 진찰하며 “약물을 하느냐”고 묻는 장면은 아예 노골적이다. 이는 1969년 베트남전 반전시위가 절정에 달했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빗댄 대사다. 당시 미국은 타국의 내전에 간섭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정부 및 이를 지지하는 기득권세력과 그런 정책 탓에 무의미하게 남의 나라에서 희생되는 젊은이들을 보호하자는 젊은 세대의 대립이 절정을 이뤘다.

▲ 영화 <시간위의 집> 스틸 이미지

매카시즘(1950~4)의 광풍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때 이 영화는 관습과 일탈, 종교적 순수함과 타락함, 사회적 억압과 이에 대한 반발, 고착된 규칙과 감춰진 진실 등에 대한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시간위의 집’도 유사하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일제의 망령과 매카시즘에 대한 우회적 비판은 참으로 촌철살인이다. 그리고 결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랑보다 위대하고, 영원한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다. “신부의 신앙은 주님이지만 엄마의 신앙은 자식”이라는 미희의 대사는 이 영화가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장르 마니아용이란 외양을 띠고 있지만 결국 가족영화이기도 하다는 명확한 주제의식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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