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유럽 동남쪽 발칸반도 남단에 위치한 역사 문화 신화 그리고 낭만의 대표적인 나라, 파란 바다와 하얀 전통가옥의 조화가 아름다운 산토리니로 우리에게 각인된 나라, 그러나 유럽발 경제위기의 핵심인 그리스. 그리스가 낳은 유명 배우이자 감독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가 ‘나의 사랑, 그리스’라는 묵직한 두 번째 장편연출 영화를 내놨다.

3편의 옴니버스가 말미에 하나의 플롯으로 완성되는 약간의 반전이 가미된 사랑얘기다. 그러나 그 저변엔 그리스가 처한 정치적 경제적 위기가 깔려있어 매우 진지하다.

‘부메랑’. 여대생 다프네는 밤길을 가던 중 괴한에게 공격을 당하지만 시리아 출신 난민 청년 파리스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거리에서 행상을 하며 살아가는 파리스에게 거부감을 느끼던 다프네는 그의 순수함에 이끌려 이내 사랑에 빠진다.

▲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스틸 이미지

60대의 다프네의 아버지는 중동 이민자들에게 지독한 반감을 가진 대표적인 파시스트 그룹 필그림의 열혈 멤버다. 부랑자들에게 가게를 5번이나 털렸지만 정부도 보험회사도 뒷짐 지고 수수방관하는 바람에 파산했다는 피해의식이 강한 그는 필그림과 함께 이민자들의 임시거처를 습격했다 거기서 파리스와 함께 있는 다프네를 보고 경악한다.

‘로세프트 50mg’. 곧 40살이 되는 지오르고는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사실상 끝났지만 어린 아들에게 차마 밝히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회사 중견간부로 공황장애 등 정신병 때문에 로세프트를 정기적으로 복용한다. 어느 날 단골 바에서 알게 된 스웨덴 여자 엘리제와 ‘원 나잇 스탠딩’의 정을 나눈 뒤 그녀에게 빠져간다.

경제난으로 위기에 처한 회사는 스웨덴의 대기업에게 넘어갔다. 알고 보니 엘리제는 경영정상화를 위한 정리해고의 책임자로 파견된 고위간부. 지오르고는 해고 대상인 죽마고우 오디세아의 구제요청을 외면하고, 다음날 오디세아는 목을 맨다.

▲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스틸 이미지

‘세컨드 찬스’. 65살 독일 학자 세바스찬은 은퇴 후 그리스로 아예 이주했다. 우연히 마트에서 알게 된 60살 여인 마리아와 매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손자까지 본 마리아 역시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 각자 자기만의 삶에 빠진 자식 때문에 그동안의 삶에 회한을 느끼던 차 세바스찬에 의해 자아를 찾고 따뜻한 그에게 빠져든다.

20대, 40대, 60대 세 커플의 사랑은 모두 위험하다. 그건 무대가 그리스라는 유럽의 용광로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리스가 안고 있는 현안은 곧 세계, 혹은 대한민국의 현실이기도 하기에 먼 나라 사정으로 비치지 않는다.

필그림이 가진 제노포비아(이방인 혐오증)는 비단 현재의 그리스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그리스를 점령한 뒤 동방원정에 나섰던 2300여 년 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IS의 광적인 테러 역시 종교와 더불어 이민족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 자유민주주의의 메카인 양 세계의 헤게모니를 주무르는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외치지만 내부적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사라질 줄 모른다.

▲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스틸 이미지

우리나라 역시 다문화가정이 흔하지만 남북갈등도 모자라 동서갈등까지 극을 향해 치닫고 있다. ‘부메랑’은 겉으론 박애주의의 순수하고 숭고한 인본주의 정신을 외치지만 사실 내가 개구리 무리에 던진 돌은 결국 내게 돌아와 큰 상처를 준다고 엄중하게 경고한다.

‘로세프트 50mg’은 세상만사의 축약이다. 직장 가정 건강, 이 세 가지는 사람들이 살면서 가장 절박하고 절실하며 피부에 깊게 와 닿는 현실이다. 사실 그것들만 안정되면 행복의 끝이다. 종교나 철학은 그 다음 문제다.

지오르고는 이 세 가지 중 그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운 게 없다. 총체적 난국이다. 겉으론 구조조정 책임자를 애인으로 둔 든든한 ‘빽’까지 갖췄으니 사회적으론 매우 안정적인 듯하지만 사회는 정글이다. 직장은 전쟁터다. 신성불가침이란 오너 외엔 없다.

▲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스틸 이미지

근본적으로 그는 부모형제와도 썩 가깝지 못하고 아내완 쇼윈도우 부부며 가장 친한 친구여야 할 아들을 속여야만 하는 궁색한 처지다. 결국 아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만 아들을 아내에게 빼앗겨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없다. 물론 그 전의 죽마고우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잃었다. 중국 사자성어엔 끈끈한 동지애를 뜻하는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다.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적과 함께 죽을 각오로 싸운다는 동귀어진이란 말도 있다. 지오르고는 오디세아와 함께 해고된다는 동귀어진의 배짱도 없는 나약한 인물이다.

이렇게 비장한 러브 스토리를 감독은 ‘세컨드 찬스’에서 해피엔딩으로 매조진다. 인생을 살 만큼 산 나이에 비로소 과거를 되돌아보고 늦은 듯하지만 이제라도 현실과 미래의 나를 그려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는 감독의 지론은 참으로 따뜻하고 배려심이 넘치며 희망적이다.

▲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 스틸 이미지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는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커플인 에로스와 프시케다. ‘어느 왕’의 딸인 프시케의 미모를 질투한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아들 에로스(큐피드)에게 프시케를 가장 못난 괴물에게 시집보내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프시케를 본 에로스는 금세 사랑에 빠져 서풍의 신 제피로스(봄의 전령)에게 그녀를 호화로운 궁전에 모실 것을 명령한다.

에로스는 밤이면 찾아와 프시케와 사랑을 나누지만 자신의 얼굴을 절대 보지 말 것을 신신당부한다. 겁에 질렸던 프시케는 이내 행복에 겨워 제피로스의 도움을 받아 집에 돌아와 이를 자랑한다. 질투심을 느낀 언니들은 양초를 주며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라고 꼬드기고 그렇게 잠든 에로스의 얼굴을 본 프시케는 그 미모에 혼미해져 그만 촛농을 에로스의 몸에 떨어뜨린다. 실망한 에로스는 그 길로 프시케의 곁을 떠난다.

절망에 빠진 프시케는 에로스를 찾아 신들의 궁전을 뒤진 끝에 아프로디테를 만나지만 아프로디테는 에로스를 스틱스(죽음의 강)와 하데스(지하세계를 지키는 신)의 아내 페르세포네에게 보내는 등 온갖 역경을 주문한다. 그럼에도 프시케가 이 모든 것을 꿋꿋이 이겨내자 결국 에로스는 제우스(주피터)에게 부탁해 프시케를 신으로 만든 뒤 백년해로한다.

프시케는 영어 사이코의 어원, 즉 영혼이고 에로스는 사랑이다. 그들이 낳은 딸 볼룹타스는 쾌락의 여신이다. 에로스는 남녀의 사랑, 부모자식의 사랑은 아가페, 우정은 필리아다. 이 영화는 이 모든 주제를 한꺼번에 담고 있다.

다프네와 파리스의 사랑은 에로스를 넘어서 세계적 화합이라는 필리아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에게 아가페는 없다. 왜냐면 세상이 지나치게 척박하기 때문이다. 그건 이기적인 정치 탓이다.

지오르고는 에로스 대 필리아, 혹은 에로스 대 아가페 사이에서 살짝 고민하지만 결국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 그에게 친구나 아들을 위한 조금만치의 이해심이나 양보는 없다. 자신의 열정과 욕심만 앞설 뿐이다. 심지어 그는 엘리제에 대한 배려심조차도 갖추지 못한다. 그가 얻은 건 고작 볼룹타스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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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못갖춘마디를 완벽한 환상곡으로 재편해 완성하는 게 바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두 노인의 황혼녘의 자아의 발견이다. 가난해서 하고 싶었던 공부도 못한 채 스무 살 안팎에 결혼해 남편 뒷바라지와 육아에만 전념해온 ‘부엌데기’ 마리아는 말도 안 통하고 지적 수준도 다른 독일 학자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지만 결국 나중엔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늘그막에야 발견한 진정한 사랑이 지적인 영혼의 교류를 가능케 해준 덕이다.

프시케의 불신은 그녀의 행복과 사랑을 죽음이란 불행으로 몰아갈 듯하지만 결국 에로스의 사랑이 그녀를 신으로 만든다. 사랑엔 고난과 역경이 필수라는 이 영화의 마지막 주제다. 이 절절한 사랑과 인생의 옴니버스를 하나로 묶는 건 시나리오와 더불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배경음악이다.

플라톤은 ‘현재와 미래가 과거와 같다면 삶은 의미가 없다’고 가르치면서도 ‘사랑은 영원한 적자계산서임에도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프네, 엘리제, 세바스찬은 사랑이 자신들의 가계부에 빨간 줄을 그을 것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사랑이란 게 부풀려진 계산서인 줄 알면서도 서슴없이 빠져들었다. 15살 이상 관람 가. 4월 20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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