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콜로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미국은 ‘컬라슬’이라고 발음하는 걸 굳이 한국식으로 명명한 것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영화 ‘콜로설’(나초 비가론도 감독)은 제목에서 이미 ‘거대한’(Huge)이란 뜻으로 커다란 사이즈의 괴수와 로봇의 등장을 예고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여자 페르소나 앤 해서웨이가 이 B급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작품의 주인공을 맡았다는 사실부터 관심을 끌지만 결론부터 내리자면 ‘소리는 요란하지만 내용물은 글쎄’에 가깝다.

서울. 공원에 있는 어린 딸을 데리러왔던 어머니는 딸이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한다. 가까운 곳에 거대한 정체불명의 괴수가 등장한 것.

25년 뒤 현재의 뉴욕. 글로리아(앤 해서웨이)는 남자친구 팀(댄 스티븐스)과 동거하며 잡지사 비정규직 기자로 일하는 30대다. 독자들에게 매번 질타를 당하는 그녀의 유일한 비전은 잘나가는 팀이고, 유일한 즐거움은 주변에 널린 무질서한 술친구들. 오늘도 어김없이 주당들과 어울려 진탕 퍼마신 뒤 아침에야 귀가해 팀의 ‘레이저 눈빛’을 받는다.

▲ 영화 <콜로설> 스틸 이미지

팀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짐을 싸라고 이별을 통보하고, 그렇게 글로리아는 모든 걸 잃은 채 부모가 남겨준 고향의 허름한 집으로 이사한다. 택시도 없는 한적한 거리에서 난감해하던 그녀 앞에 트럭을 몰고 가던 초등학교 동기동창 오스틴(제이슨 서디키스)이 나타난다.

오스틴은 아버지가 물려준 바를 운영하며 살고 있는데 고맙게도 그는 ‘알바’까지 제안한다. 그렇게 글로리아는 고향의 바에서 일하면서 영업종료 후에는 오스틴과 그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또 술판을 벌인다. 그 중에서 순수한 청년 조엘과 잠자리를 같이한다.

그들은 뉴스에서 서울 한복판에 거대한 괴수가 나타나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다. 글로리아는 괴수가 정수리를 긁적이는 모습을 보곤 자신이 술에 취하면 괴수로 변해 그런 난동을 벌이고, 그럴 수 있게 해주는 게 바로 자신의 어릴 적 특별한 경험이 있는 터인 현재의 놀이터인 것을 알게 돼 오스틴 등에게 고백한다.

▲ 영화 <콜로설> 스틸 이미지

그러던 어느 날 괴수의 친구일지 적일지 모를 그보다 약간 더 큰 로봇이 등장한다. 그의 정체는 바로 오스틴. 무고한 생명을 죽인 죄책감에 괴로운 글로리아는 놀이터에 안 가려하지만 오스틴은 재미로, 혹은 글로리아에 대한 적개심으로 놀이터에 선다. 그러자 글로리아도 놀이터에 들어가 그를 말려보지만 연약한 여자가 건장한 남자를 이길 순 없는 노릇. 그렇게 서울은 아수라장으로 변해간다.

장르적 전통기법과 방식 등을 무시한 채 신선한 아이디어로 풀어낸 발상은 매우 기발하고 흥미롭다. 최악의 역사적 재앙을 넘어서 인류의 말살이 될 법한 괴수출현이 알고 보니 한 알코올의존증 사회부적응자의 귀여운 주정에서 발생했다는 설정, 그 미모의 여주인공이 애교를 부리면 동시에 괴수가 지구촌 반대편에서 행동한다는 내용 등은 상업영화의 코미디의 재미로선 신선하다.

▲ 영화 <콜로설> 스틸 이미지

그러나 그녀의 아픔의 원인과 과정이 생략된 게 시나리오의 기본틀이 약한 결정적인 패착이다. 게다가 오스틴이 글로리아를 혐오하거나 배척하게 된 배경설명 역시 나약하다. 고작 미술솜씨 하나 뒤졌다고 그토록 저주하는 건 흔한 고어무비의 연쇄살인마의 ‘묻지 마 범죄’보다 무차별적이다.

또 조엘을 질투하고 팀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 역시 불분명하다. 영화에서 오스틴은 글로리아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거나 정신적 애정을 표현 못해 어리광을 부리는 유아적 정신상태를 보이진 않는다. 그냥 어릴 적 그녀에게 모든 면에서 뒤졌다는 트라우마 하나로 역전된 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 그녀를 괴롭히는 사디즘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맞지만 여전히 목적의식은 흐릿하다. 광적인 스토커나 극단적인 정신병자라고 보기엔 그럭저럭 멀쩡하다.

▲ 영화 <콜로설> 스틸 이미지

다만, 남성의 그릇된 라이벌의식 혹은 남존여비 사상에서 비롯된 여성혐오증과 이를 통해 발생하는 폭력 등에 대한 경고는 웬만한 스릴러 뺨칠 만큼 생생하다. 오스틴은 처음엔 곤경에 처한 글로리아의 구세주였다. 오래 방치된 빈집을 수선하고 새 살림살이를 장만해야하는 일은 한 여자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값싼 중고차 한 대 살 능력도 없다.

자신의 승용차를 이용해 새 살림살이를 운반해주고 창고에 있던 가구 등을 거저 내주며 고용까지 해줌으로써 경제적 지원과 생활의 편의 제공을 최대한 쏟아 부은 오스틴의 선행은 뉴욕을 떠난 귀향을 금의환향이 아닌 낙오라고 크게 상심했던 글로리아에게 새 출발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 부푼 꿈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 악몽이 됐다. 주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제일 위협적인 공포가 된다는 발상은 스릴러 영화의 클리셰이자 현대범죄수사의 교과서며 특히 여성 (성)폭력의 실상이다.

▲ 영화 <콜로설> 스틸 이미지

여의도 한강 부천 등지에서 촬영된 서울 신에 기대할 필요는 없다. 왜 하필 서울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는, 매우 불친절한 감독의 의도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데뷔작이라고 믿을 수 없는 피터 잭슨의 B급 SF걸작 ‘고무인간의 최후’ 수준의 기발함에서 출발해 금세 동력과 추진력이 쇠잔했지만 용두사미는 면했다는 게 그나마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건 글로리아가 오스틴을 이겨내는 방법이다. 엄마는 모성애라는 무기로 강해지지만 여성은 인류애로 막강해진다는 메시지다.

화려한 비주얼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기괴한 동화를 쓰는 데 있어 팀 버튼에 뒤지지 않을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대사에서 언급하지만 비가론도의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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