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전인권의 히트곡 ‘걱정 말아요, 그대’가 표절시비에 휘말리며 재조명되고 있다. 표절여부를 떠나 만약 이 노래가 원곡으로 의심받는 독일 그룹 블랙 푀스(Bläck Fööss)의 ‘드링크 도흐 아이네 메트(Drink doch eine met)’처럼 매우 가벼운 가사였다면 과연 지금처럼 크게 히트되고, 또 표절시비에 올랐을까?

‘(전략)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중략)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사랑도 경제활동도 모두 힘든 이 때,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남을 탓하는 비겁하고 옹졸한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한 채 새로운 희망을 찾자는 내용이다. 이 얼마나 작금의 배경과 딱 맞아 떨어지는가! 마치 하루 종일 고단한 일을 마친 뒤 석양이 지는 퇴근길에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숙소로 돌아가는 한 노동자의 뒷모습을 연상케 하는 리듬과 멜로디가 적절하고, 그걸 토로하듯, 혹은 하소연하듯 표현한 전인권의 창법이 압권이다.

뭣보다 이 곡을 뒤늦게 빛을 발하는 스테디셀러로 만든 건 바로 시의적절한 가사다. 표절 여부는 멜로디에 있지만 어쨌든 ‘걱정 말아요, 그대’의 완성도는 누가 뭐래도 가사에 있다는 점에선 작사가 및 가수들에게 보내는 울림이 크다.

일반적으로 클래식에는 가사가 없다. 재즈 역시 그런 편이다. 악기 구성부터 연주법까지 조금 난해한 건 맞지만 이들 장르가 대중친화적인 방향과 살짝 거리를 두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때문이다.

상업적인 대중가요는 무조건 가사가 있다. 김현식의 하모니카 리드곡 ‘한국사람’처럼 일부 뮤지션의 실험적인 인스트러멘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흥행을 노리는 대중가요에서 가사는 필수이다 못해 선봉장이다.

그래서 가사에서 시의성 역시 매우 중요하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가 그토록 폭발적으로 또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배경은 한국전쟁이란 엄청난 시련을 겪을 당시의 시대상을 가사 안에 그대로 담았기 때문이란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SM엔터테인먼트의 수장 이수만은 1970년대 유명 통기타 가수였다.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는 대학 캠퍼스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통기타 가수의 붐을 조성한 소비자 역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10~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민주화를 향한 움직임과 더불어 자유연애가 본격적으로 용틀임하는 가운데 연인 혹은 신혼부부사이의 호칭부터 변했다. 이전까지 폐쇄적이었기에 연인간의 호칭이 불분명했지만 대학생으로부터 ‘자기’라는 게 유행되기 시작한 것.

그러자 이수만은 재빨리 당시 연인들의 데이트의 필수간식이었던 뻥튀기까지 가사에 등장시키는 ‘자기’라는 곡을 발표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가사는 가요에서 절반을 훨씬 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증거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는 못이나 늪보다 호수가 적은 편이다. 이수만과 비슷한 시기에 세부엉은 ‘호수에 잠긴 달’이란 곡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이 곡은 아직도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다. 또 정미조는 1922년 발표된 김소월의 동명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개여울’로 빅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여기서 호수는 사랑에 빠진 마음을, 개여울은 연인을 각각 의미한다. 대학가 문화가 젊은이들의 문화의 주류였기에 보다 지적인 가사가 필요하다는 발상에서 그런 시적인 글 혹은 아예 시가 가사로 쓰인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댄스그룹이 창궐하면서 우리 가요의 가사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서태지와아이들과 듀스가 시사적이거나 서정적인 가사로 전체적인 저급화의 물결 속에서도 품격을 지키기는 했지만 사랑타령 일색의 원색적이거나 저급한 가사가 선두에 나서게 됐다.

이른바 후크송이 대세인 요즘은 아예 국어가 무너졌다. 그 시초는 이은하의 ‘아리송해’라고 볼 수 있다. ‘앞 뒤 틀린 너의 말이 아리송해’다. 유독 우리나라만 ‘다르다(different)’를 ‘틀리다(wrong)’고 잘못 표현한다. 물론 ‘옳다’를 Right(오른쪽)로 정한 미국의 정서에도 의혹의 여지는 있지만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잘못됐다고 표현하는 정서는 참으로 처참하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먼저 일제강점기의 잔재다. 일본어의 ‘ちがう(지가우)’는 바로 ‘다르다’와 ‘틀리다’의 두 가지 뜻을 모두 갖고 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그 영향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게 요즘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논쟁으로 첨예하게 대립한 국민적 정서를 대입할 수 있다.

최근 개그우먼 홍현희의 흑인비하 개그 논란에서 보듯 우리 국민들에게 잔존한 편견은 큰 사회적 문제다. 정부는 한때 장애인을 장애우로 정정했다가 장애인으로 회귀하는 해프닝을 일으킨 바 있다. 그 이유는 장애인이 비하적 표현일 수 있어 장애우라고 부드럽게 완화했지만 장애인만 별도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편파적일 수 있다고 해서 되돌린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양 진영은 자신의 생각 이념 주장 등과 다르면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틀리다’고 치부해버리는 양상이다. 유대인 사회에 고대부터 지금까지 토론의 문화가 굳건하게 자리 잡은 바는 전 세계에 가르치는 의미가 크다. 유대인의 도서실은 우리나라처럼 조용하지 않고 시끄럽다. 일면식도 없는 대학생들이 마주앉아 열띤 토론을 벌이며 서로의 지식을 나누거나 발전시키는 것으로 유명해 유럽도 따라하는 추세다.

우리나라는 오로지 주입식 교육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면서 일방통행식 교육을 학생들의 머릿속에 심어왔다. 따라서 스승의 가르침에 대해 이유를 묻거나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체제에 대한 반역행위와 다름없다. 스승은 무조건 맞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틀린 것이다.

반면에 국어공부에 도움을 준 곡도 있었다. 구창모의 ‘희나리’와 나훈아의 ‘무시로’는 그다지 널리 쓰이지 않던 단어를 가사와 제목에 올려 국민들의 지적 수준을 높였다.

김수희의 히트곡 ‘너무합니다’는 너무라는 부정적 성격의 부사를 제일 잘 알려준 대표곡이지만 현재 너무는 긍정적 의미와 혼합돼 사용되다 못해 아예 국어학회는 그게 대세라는 이유로 인정해버렸다. 2000년대 중반 사랑받은 KBS2 ‘개그콘서트’의 ‘너무 좋아’ 코너도 거기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러나 생각과 논란의 여지는 남는다. 국어는 세종 때 체계적으로 완성돼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국민의 정서와 교육에 깊게 자리 잡았고, 국가의 자랑으로 우뚝 섰다. 정부는 국어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널리 홍보하고 있으며, 한류열풍 덕에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올바른 일인지에 대한 재고는 필요한 듯하다.

요즘은 아예 가사 안에서 ‘너무 너무 너무’라며 무한적으로 반복되기 일쑤다. 국어는 수천 년 동안 조상들이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생활과 과학과 문화에 근거해 터를 닦고 완성한 자랑거리인데 SNS가 문화의 주류를 이룬다고 그걸 컴퓨터 업그레이드하듯 기계적으로 인정해버리면 종당엔 국어는 정체성을 잃고 외국어 혹은 신조어 일색이 될 위험성이 농후하다.

밥 딜런이 대중가수로서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배경은 그의 가사에 있다. 가요는 생활이고, 안식이고, 취미인 게 맞지만 문화적 발전과 지적 정서함양에 도움이 된다면 그 생명력과 값어치는 당연히 길고 높아진다.

드라마 등 방송은 1시간, 영화는 2시간이지만 가요는 3분 내외에 대중을 사로잡는 마법을 부린다. 가사가 시사문제에, 사회적 흐름에, 국민적 정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작사가들이 새삼스레 진지해질 필요가 있는 이유다. 가사 때문에 조용필의 대표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고, 장범준이 떼돈을 번 이유는 ‘벚꽃엔딩’이 가사 덕에 봄 시즌 송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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