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아무리 사랑하여 결혼한 부부라도 직장 생활과 살림, 아이 키우기 등으로 바쁘게 살다 보면, 이제는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로서의 의무감이나 서로에 대한 필요 때문에 함께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공생관계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비록 연애기간이나 신혼 때 모습과는 좀 다르기는 하겠지만, 결혼기간 내내 애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지름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동안 바람을 피우거나 큰 잘못 없이 지내왔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고 되묻기도 하고, 또 더러는 마음은 있지만 성격적으로 표현이 서투르기 때문에, 혹은 바쁘다 보니 그럴 틈이 없었다고 변명하기도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잘못도 없지만, 재미도 없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언제 어떤 계기로 부부간에의 위기가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여 부부가 살다 보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싸움 후에도 감정이 해소되지 않아 마음에 앙금으로 남기도 합니다. 심지어 본인이 잘못한 경우조차 ‘이 정도도 받아주지 않는가?’하면서 실망하게 되고, 이런 감정은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변하여 쌓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의 찌꺼기들은 적당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상대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충동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사소한 일로도 싸우게 되고, 또 한 번 싸우면 마음이 쉽게 풀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는 마치 우리 몸 속의 ‘나쁜 콜레스테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나쁜 콜레스테롤은 혈액을 따라 다니다가 그 덩어리가 점점 커지면 혈관벽에 응고되어 혈액의 흐름에 장애를 일으키고 혹은 혈액 중에 떠돌아 다니다가 다른 곳의 혈관을 막아 심각한 질환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런 장애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규칙적인 운동이나 바람직한 식습관으로 섭취할 수 있는 ‘좋은 콜레스테롤’은 혈관 내의 나쁜 콜레스테롤을 제거하여 혈액순환을 좋게 해줍니다.이처럼 부부 관계를 해필 수 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깨끗이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애정 표현’입니다.

부부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 부부라면 다른 금슬 좋은 부부들은 어떻게 그렇게 사이 좋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무슨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살면서 당연히 잘못을 저지르고 또 상대에게 실망스럽고 불쾌한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선 자신이 불편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상대의 웬만한 잘못을 확대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또 잘못한 본인도 배우자에게 심하게 추궁 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일찍 솔직하게 이야기하니까 문제가 커지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싸우게 되는 경우에도 누구든 양보를 하여 화해하자는 표현을 하고, 상대도 역시 못이기는 체 화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대신 사소한 것이라도 기뻐할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즐거워합니다.

성 생활도 활발하지만 평소의 가벼운 신체접촉으로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수시로 확인합니다. 그러다 보면 불쾌했던 기억들은 언제 그랬던가 할 정도로 희미해지고 맙니다. 그러니까 부부의 사이가 나빠진 채로 굳어지지 않고, 좋은 관계를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은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건강하게 지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부 관계를 연구한 심리학자 존 가트먼은 이혼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경험 1에 비해서 긍정적인 경험이 5 이상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가 연구했던 곳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거꾸로 부정적인 경험 5에 적어도 1 정도의 긍정적인 경험만 있어도 이혼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결정적인 잘못만 아니라면, 부정적인 경험보다는 긍정적인 경험의 효과가 휠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삼아 말을 하자면, 결혼 생활에서 닥칠 수 있는 위기를 예방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피차의 잘못을 줄이려는 노력보다) 평소의 ‘애정 표현’입니다.

에릭 에릭슨이라는 정신분석학자는 ‘기본적 신뢰 basic trust’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 조건으로 꼽았습니다. 혼자서 생존할 능력이 부족한 영아는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덕분에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자신의 불편을 해결해주고 나아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사람이 최선을 다하여 돌보고 지켜줄 만큼 자기 자신이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기본적 신뢰입니다.

우리는 이 신뢰감을 토대로 해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상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는 영아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는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자신이 (사랑을 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얻고, 이 자신감을 토대로 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그를 위해서 어떤 어려움도 견뎌내려는 책임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린 시절에 이런 기본적 신뢰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감을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이후에도 (설령 결혼을 하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이들은 삶에 대한 애착이나 책임감이 약하기 때문에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여, 결과적으로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할 위험성이 높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부 간에 애정 표현을 자주 하는 것은 생활의 활기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배우자의 사랑을 통해서 자신이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이 배우자에게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또 다시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비로소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결혼한 부부에게 애정표현은, 우리의 심장박동이나 호흡처럼, 그 날의 기분이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당연하고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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