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요아킴 뢰닝, 에스펜 잔드베르크 감독,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배급)는 장단점이 확실한 시리즈의 5번째로서 그나마 미덕을 갖추려 애를 쓴 기색이 역력하다.

바다의 살인강도 해적을 낭만과 결합한 시도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상업주의의 돈에 눈먼 상투적인 수법이다. 영화의 태생부터 불편한 결정적인 핸디캡이다. 아무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지적인 만족을 찾는 게 무리하고 하더라도 이 시리즈는 지나치게 드러내놓고 ‘나 돈 벌겠다, 어쩔래?’라고 뻔뻔스러운 장삿속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번엔 산만했던 4편의 시리즈를 정리하려는 미덕을 갖췄다. 뭣보다 비주얼이 시리즈 중 최고다. 그래서 재미있다. 카리브해에서 그리스 신화를 논하는 게 어색하긴 하지만 뭐 어떠랴? 어차피 할리우드인데.

3편 ‘세상의 끝에서’에서 윌 터너(올랜도 블룸)는 살기(?) 위해 데비 존스(빌 나이)의 심장을 찌르고 자신의 심장을 꺼내 망자의 함에 보관함으로써 저주받은 망자의 배 플라잉 더치맨의 선장이 돼 해저에 가라앉고는 10년마다 세상에 나와 단 하루만 보낼 수 있는 신세가 됐다. 그의 아들 헨리(브렌튼 스웨이츠)가 어느덧 틴에이저가 됐다. 아버지가 그리운 헨리는 바다 속에 뛰어들어 플라잉 더치맨에 승선한다.

▲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스틸 이미지

그러나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순응해야 하고 아들과 함께할 수 없는 것을 잘 아는 윌은 헨리를 모질게 물리친다. 헨리는 아버지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잭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채 성장해 9년 뒤 드디어 그를 찾아 나선다.

4편 ‘낯선 조류’(2011)에서 검은 수염(이안 맥쉐인)에 의해 해적선 블랙 펄이 유리병 안에 갇힘으로써 무기력해진 잭은 자금마련을 위해 선원들과 함께 카리브해의 섬나라 생 마르탱의 은행을 털지만 정작 손에 쥔 건 금화 한 닢.

실망한 선원들은 잭에게서 떠나고 잭은 경찰에 붙잡혀 투옥된다. 거기엔 마녀라는 죄목으로 붙잡힌 천문학자 카리나 스미스(카야 스코델라리오)도 있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에서 알게 된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지도’를 찾고 있다. 그걸 통해 포세이돈(넵튠, 바다의 신)의 삼지창을 찾고 이를 통해 아버지를 만나는 게 목적이다. 두 사람이 공개 처형되기 직전 헨리가 잭의 선원들을 이끌고 나타나 구해준다.

▲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스틸 이미지

1편 ‘블랙 펄의 저주’(2003)에서 사리사욕 탓에 잭을 배신하고 적이 된 헥터 바르보사(제프리 러쉬)의 배를 유령군함 사일런트 메리가 점령한다. 선장은 스페인의 캡틴 살라자르(하비에르 바르뎀). 생전의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해적에 잃은 한으로 해군 장교가 돼 수천 명의 해적을 죽여 ‘바다의 학살자’로 위용을 떨쳤지만 잭의 계략에 의해 악마의 삼각지대에서 부하들과 함께 죽은 뒤 유령이 됐다. 저주가 풀리는 날 삼각지대에서 벗어나 잭에게 복수할 것만을 오매불망 기다려왔다.

빈털터리가 된 잭은 생 마르탱에서 술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나침반을 맡긴다. 그러나 그 나침반이 그의 손을 떠나는 순간 삼각지대의 저주가 풀림으로써 사일런트 메리와 살라자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 죽을 위기에서 바르보사는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살라자르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이 대신 잭을 잡아주겠노라 약속하고 풀려난다.

헨리와 카리나는 아버지를 찾는다는 공통의 목표에 의기투합하고, 잭은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찾는다는 그들의 목적에 솔깃해 자신의 허접한 배 죽어가는 갈매기에 태운다. 그렇게 항해를 시작한 잭 일행은 생 마르탱의 군대, 바르보사, 살라자르 등의 추적에 사면초가가 되는데.

▲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스틸 이미지

스케일과 비주얼에선 시리즈 중 최고다. 초반 잭의 부하들이 은행건물을 통째로 끌고 달아나는 장면은 지난 시리즈의 거대한 나무바퀴 액션 신보다 거대하고 스펙터클하며 유머러스하다. 살라자르의 캐릭터는 데비 존스보다 유머감각은 뒤떨어지지만 공포의 존재감은 앞선다. 유령상어는 대형 크라켄보다 덜 위협적이지만 디즈니랜드의 롤러코스터 같은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압권은 삼지창의 열쇠를 간직한 영롱한 보석들의 섬과 갈라진 바다. 여기서 펼쳐지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비주얼은 시리즈 중에 없었던 새로운 동화다.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닻 액션 신에서 영화의 재미가 완성된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트레이드마크는 단연 잭의 술에 절어있는 듯한 흐느적거리는 행동과 말투.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슬랩스틱 코미디다. 끊임없이 생명이 경각에 달하는 위험에 처해도 전혀 겁을 먹거나 놀라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때론 야비하게 위기를 모면하곤 한다. 또한 그는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그저 상황을 즐기고 그 어떤 환경도 만족할 줄 아는 여유를 보인다.

▲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스틸 이미지

그런 낭만이 바로 카리브해의 유유자적한 이미지와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는 게 이 영화의 장점.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별로 철학이 없는 게 핸디캡이기도 하다. 그런 허점을 염두에 뒀는지 이번엔 과학과 신화의 대결이란 철학, 나침반으로 은유한 올바른 인생의 진로와 자아 찾기, 그리고 할리우드의 전매특허인 가족애를 전면에 배치했다.

별을 보고 진로를 결정하는 천문학자 카리나와 전설을 좇아 행동하는 헨리는 각각 과학과 신화의 상징이다. “그깟 떠도는 얘기를 믿냐”고 헨리를 구박했던 카리나가 결국 헨리에게 굴복하는 건 눈에 보이는 것, 과학으로 증명되는 것만 믿고 신화를 멀리하는 현대인에 대한 조소다.

나침반은 인생의 올바른 진로다. 알코올의존증 환자인 잭이 죽을 위기에 처하는 건 술 한 잔에 나침반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으레 그래왔듯 이기심과 정의의 갈등 끝에 명분을 선택한 그에게 결국 나침반은 되돌아오고 나침반은 그에게 나아가야할 정도의 방향을 가리킨다.

▲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스틸 이미지

인생 선배인 잭의 이런 변화는 각자 태생적 트라우마에 괴로워하던 젊은 카리나와 헨리에게 기성세대와의 화해와 화합을 선사함으로써 해탈에 이르게 한다. 각 캐릭터의 해설에 집중하느라 다소 산만하거나 복잡할 수 있었던 각 시퀀스가 결말에 이르러 잘 봉합되는 이유다.

세상의 모든 저주를 푸는 유일한 열쇠가 포세이돈의 삼지창이라면 잭은 디오니소스(바쿠스)다. 디오니소스는 포도, 술, 쾌락, 다산, 황홀경, 그리고 부활을 의미하므로 잭의 캐릭터와 딱 들어맞는다.

유력 천문학자의 연구실 문 앞에 붙은 ‘여자와 동물 출입금지’라는 팻말은 남녀평등이란 말 자체가 불평등으로 인식될 정도로 사회 전반적으로 성차별이 없어진 듯한 분위기지만 사실 차별이 엄연히 잔존한 사회에 대한 경고라 반갑지만 정작 카리나는 리플리(‘에이리언’)보다 한참 나약한 게 옥에 티다. 대신 젊은 시절의 니콜 키드먼이 염색한 듯한 느낌을 주는 스코델라리오의 매력이 볼거리. 언제나 그래왔듯 이 시리즈는 바다가 생각나는 시즌에 가족오락물로선 제격이다. 129분. 12살 이상. 5월 2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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