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과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체면을 구긴 DC가 야심차게 준비한 ‘원더우먼’(패티 젠킨스 감독,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배급)이 과연 ‘다크 나이트’ 시리즈 이후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의 대항마가 될 수 있을까?

‘배트맨 대 슈퍼맨’은 죽일 듯이 싸우던 두 영웅이 어머니의 이름이 같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화해해 둠즈데이에 맞선다는 내용으로 헛웃음을 유발했지만 원더우먼 하난 건졌다. 당연히 그 역할을 맡은 갤 가돗의 존재감이 유력하게 작용했다. 과연 그녀를 원톱으로 내세운 ‘원더우먼’은 대담하게 구약성서에 맞선 ‘종의 기원’부터 밑밥으로 내던진다.

그리스 신화 속 전쟁의 신 아레스는 올림포스의 제왕 제우스와 아내 헤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제우스와 티탄 신족 메티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무식하고 포악한 아레스는 닥치는 대로 인명을 살상하고 도시를 파괴하지만 지략과 전술로 무장한 아테나는 오히려 그런 아레스로부터 인류를 보호한다.

▲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당연히 제우스는 아레스를 싫어하고 아테나를 끔찍이 아낀다. 인류도 그녀의 이름을 본뜬 아테네 시에 신전을 지어 우러렀다. 불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아레스의 친형제. 못생긴 그를 혐오한 헤라가 지상에 내던지는 바람에 절름발이가 되고 제우스는 불쌍히 여겨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붙여준다. 그런데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 불륜의 사랑에 빠진다.

뿐만 아니라 아레스는 수많은 여신 혹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데 님프 하르모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이 아마조네스 왕국을 건설하고 그는 그 여왕 중 오트레레와의 사이에서 히폴리테와 안티오페 등의 딸을 낳는다. 여왕이 된 히폴리테는 아레스에게서 물려받은 여왕의 상징인 마법의 허리띠를 차고 있는데 이를 빼앗으러 온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제우스가 인간을 창조하던 시대부터 친절하게 설명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아레스가 인간세계를 파괴하자 제우스가 그를 물리쳐 봉인한 뒤 아마조네스를 신비의 섬 데미스키라로 인도해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었다는 전설을 끝맺고 1900년대 초로 끌고 간다.

▲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전사 중의 전사인 동생 안티오페의 도움을 받아 여왕 히폴리테가 잘 다스리는 데미스키라는 매우 평화롭다. 8살의 공주 다이애나는 타고난 전사의 본능 때문에 전투수업을 받고 싶지만 그녀를 매우 아끼는 히폴리테는 번번이 만류한다. 하지만 소녀는 엄마 몰래 이모에게서 특별과외를 받으며 성장해 어느덧 성인이 된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탄생했냐고 묻고 번번이 엄마는 “진흙으로 빚은 뒤 제우스에게 부탁했더니 생명을 불어넣어줬다”고 답한다. 그런 그녀 앞에 영국 공군 대위 트레버(크리스 파인)가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스파이로 독일군에 잠입한 그는 야심찬 루덴도르프 장군이 마루 박사에게 의뢰해 대량살상용 독가스 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알고 그 모든 것이 담긴 노트를 훔쳐 도망쳐온 것.

현실적 차원과 다른 세계인 데미스키라에 트레버가 나타난 것도 모자라 그를 쫓아온 독일군까지 등장해 일대 전투가 벌어지고 아마조네스는 침입자들을 모두 물리친다. 다이애나는 인간계와 아마조네스의 경계가 무너진 게 아레스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반대하는 엄마를 피해 다이애나는 트레버와 함께 야반도주하지만 이를 눈치 챈 엄마가 3개의 무기를 건네며 용기를 북돋운다.

▲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검 갓킬러, 진실을 말하게 하는 채찍, 그리고 무적의 방패다. 트레버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범죄자 친구들을 불러 모아 다이애나와 함께 제일 치열한 전쟁터에 참전한다. 그들의 후원자는 갑부 귀족인 패트릭 경.

현재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전쟁은 곧 휴전협정이 맺어질 듯하지만 루덴도르프는 휴전을 주장하는 장군들을 몰살한 뒤 독가스로 기어코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작전을 수행하는 중. 다이애나는 루덴도르프가 바로 아레스의 현신이라 확신하고 있고, 그런 다이애나 일행의 열정을 패트릭이 높이 사 사비를 털어준 것.

그러나 특수무기로 무장한 루덴도르프 세력의 화력은 의외로 강하고 다이애나의 힘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황이라 전세는 점점 불리한 방향으로 흐른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제외하곤 유독 영화에서 DC가 마블에 고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설왕설래한다. 그 중에서 DC 엑스펜디드 유니버스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란 설명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 마블의 거의 모든 슈퍼히어로 시리즈는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연결성을 지니는 데 비해 DC는 그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 ‘배트맨 대 슈퍼맨’만 하더라도 고담과 메트로폴리스가 바로 이웃 도시였다는 설정은 정말 허무했다.

▲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그래서인지 다이애나는 부모에 대한 트라우마와 정체성의 혼란에 따른 소외감에 진저리치는 어두운 고뇌는 없고 시종일관 긍정적이다. ‘다크 나이트’부터 ‘맨 오브 스틸’까지 자신들의 영웅적 행동이 의도와 달리 도시를 파괴하고 인명을 살상한다는 의외성에 자괴감을 느끼는 갈등도 그녀에겐 없다.

성경이 아닌, 토우(진흙인형)에 제우스가 숨을 불어넣어 사람이 됐다는 신화를 믿는 그녀는 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녀는 종족에게 구전돼온 제우스의 전설을 믿고 감히 자기 혼자 아레스를 물리칠 것이란 허황된 자신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악무도한 독일군 장교가 바로 아레스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아직 소녀에서 여인이 안 됐기 때문일까?

영화는 신화와 종교와 현실의 국경에서 절묘한 외줄타기를 한다. 데미스키라는 신의 영역, 즉 그리스신화가 이어져온 고대 그리스고, 전란의 20세기 초는 바로 21세기의 현실이다. 가면을 쓴 천재 과학자 마루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정작 자아를 찾지 못하고 정체성의 혼란에 괴로워하는 또 다른 고담시(어두운 현실)의 배트맨이다. 가치관 없이 루덴도르프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충성은 제복과 시스템으로 획일화된 현대판 ‘모던 타임즈’(찰리 채플린)의 노동자이자 길들여진 지식인이다.

▲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신이 창조한 인류는 결국 현실을 폐허로 만들다 못해 신이 만든 유토피아까지 부분적으로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여기서 신은 고뇌한다. 과연 인류를 멸절할 것인가, 아니면 인위적 조절로 다시 평화를 가져다줄 것인가? 다이애나는 바로 그 중간자다. 정체성이 불분명하지만 의심이 없고, 아직 덜 익었지만 신념에 확신을 갖고 있으며, 맹목적인 인류애로 중무장한 휴머니스트이자 정의의 사도다.

영화는 ‘원더우먼’이란 제목답게 그녀의 출생의 비밀부터 슈퍼히어로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첫 회라는 정체성에 충실한 편이다. 마치 무협지처럼 전투능력이 일취월장하며 성장해가는 과정은 슈퍼히어로물치고는 꽤 설득력 있는 점층법의 화법을 사용한다.

▲ 영화 <원더 우먼> 스틸 이미지

하지만 군 수뇌급 회의장의 ‘여자 출입금지’란 은유적 여권신장의 메시지와 세상을 구하는 게 여자란 직설화법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반대의 길을 걷는 다른 장치들은 불편하다. 비키니에 가까운 다이애나의 의상을 트레버는 물론 같은 여자들까지 앞 다퉈 가리려하는 건 유머라기보다는 여전히 여자를 차별하는 남자들의 저급한 욕망의 숨길 수 없는 본능이다. 게다가 일전을 앞둔 다이애나와 트레버의 뜬금없는 ‘하룻밤’이라니!

초반 데미스키라의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풍광과 아마조네스의 눈부신 매력이 동화라면 현실의 전쟁터는 지옥도로 묘한 대조를 이룬다. 갤 가돗의 미모와 성적 매력이 전편을 가득 채우지만 어쩐지 ‘엑스맨 탄생: 울버린’ 속 울버린의 비슷한 활약 혹은 ‘왓치맨’ 속 닥터 맨해튼의 베트남전 참전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141분. 12살 이상. 5월 3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