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악녀>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페미니즘을 앞세운 액션 영화라고 하면 리들리 스캇의 ‘에이리언’이고, 누아르를 꼽으라면 ‘델마와 루이스’다. 그 철학과 정신을 이어받아 재미를 더한 정점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이고, 여기에 공간과 시간에 의한 존재의 의의와 역사를 첨가한 작품이 뤽 베송의 최초의 여성인류화석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붙은 이름을 제목으로 한 ‘루시’다.

이런 작품들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악녀’(정병길 감독, NEW 배급)는 한 마디로 재미있는 영화고,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디지털 정신에 충만한 스타일리쉬 액션 감성 누아르다.

쓸쓸한 휘파람이 ‘메기의 추억’을 부르는 암전이 지나면 롤플레잉게임 ‘서든 어택’처럼 1인칭 시점에서 실내 좁은 공간을 주인공이 전진해간다.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총검으로 무장한 조직폭력배들. 마치 ‘킬 빌’과 ‘짝패’(류승완 감독)처럼 주인공은 게임의 레벨을 높여가듯 하나하나 처치해나간다. 최종 레벨인 듯한 체육관에 도착해서야 주인공의 정체가 드러난다. 숙희(김옥빈)다.

▲ 영화 <악녀> 스틸 이미지

최정예 주먹들을 정리한 숙희는 두목과 창밖으로 몸을 내던져 에어컨 실외기에 매달려 아슬아슬한 대결을 펼친 끝에 그를 제거하곤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사뿐하게 착지한다. 그리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된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외딴곳의 안가. 감시하는 사람들을 제압한 뒤 탈출하려 이곳저곳을 헤매지만 이상하다. 발레 연습실, 연극 공연무대, 요리 실습실 등이 이어질 뿐 퇴로가 안 보이는 기묘한 공간이다.

탈출 실패. 그곳은 국정원이 은밀하게 운영하는 킬러 양성소였다. 그녀는 성형수술을 받은 뒤 국가를 위한 위법 암살을 하는 요원이 된다. 그녀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어느덧 출산해 예쁜 딸 은애를 낳는다.

어릴 적 숙희는 옌벤에서 홀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친구 장천(정해균)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이 광경을 침대 밑에서 부들부들 떨며 바라봐야 했던 그녀는 ‘메기의 추억’의 휘파람 소리만 듣다가 장천에게 붙잡혀 생면부지의 짐승 같은 아저씨에게 강간당할 뻔한 위기에서 중상(신하균)에게 구출됐다.

▲ 영화 <악녀> 스틸 이미지

국제 범죄조직을 이끄는 중상은 숙희를 엄청난 능력의 킬러로 키웠다. 오로지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험난한 훈련과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일당백의 킬러로 성장한 숙희는 어느덧 자신에게만큼은 따뜻한 중상과 사랑에 빠져 서울로 신혼여행을 간다. 첫날 중상은 부하의 전화를 받고 밖에 나간 뒤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다. 장천의 행위가 확실한 상흔을 남긴 채. 은애는 중상의 아이.

그 복수를 하기 위해 조직폭력배의 본거지에 뛰어들었다가 국정원 킬러양성소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 양성소의 리더는 피도 눈물도 없는 권 부장(김서형). 숙희는 드디어 최후의 임무를 완수한 뒤 은애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온다. 국정원이 마련해준 소박한 아파트에 정착한 그녀는 연극배우로 평범하게 사는 가운데 간간이 권 부장의 명령에 따라 새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이사 첫날부터 이웃의 현수(성준)가 지나치게 살갑게 다가온다. 처음엔 본능적인 경계심으로 멀리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착한 심성과 따뜻한 배려심이 넘치는 그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고 결국 그와 결혼식을 올린다. 사실 그는 숙희를 감시하고 포섭하라는 권 부장의 명령을 수행하는 국정원의 직원.

▲ 영화 <악녀> 스틸 이미지

결혼식 날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은 숙희는 권 부장의 명령에 따라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가 원거리 저격용 라이플을 꺼내들고 표적을 노려본다. 그런데 표적은 바로 중상. 평정심을 잃은 그녀는 사살에 실패한다.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아픔을 잊고 사랑하는 은애와 함께 한없이 포근한 현수와의 새 인생을 살아가던 숙희에게 예전보다 더 큰 혼돈과 갈등과 의심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 앞에 중상이 나타난다. 도대체 진실은 뭣일까?

액션 누아르란 장르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한국영화 중 최고다. 아니, 해외 우수작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감독의 상상력과 오마주에 김옥빈의 열정이 그 이상의 비주얼을 창조해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주먹 크로스 액션이나 ‘올드 보이’의 장도리 액션은 이제 역사의 한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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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모터사이클 위에서의 장검 대결, 보닛 위에 앉아 한 손을 뒤로 뻗어 운전대를 조작하며 달리는 카 체이싱, 마을버스에 매달려 적들을 제압하는 액션 등이 한국적 액션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것이다. 모터사이클 질주나 웨딩드레스 스나이퍼 등은 ‘킬 빌’이 떠오르는 게 사실이지만 그 모든 건 감독의 감각과 김옥빈의 열성이 창조로 승화시켰다. 김옥빈은 우마 서먼보다 유니크하고, 안젤리나 졸리보다 섹시하다.

다만 서사 구조의 미흡 혹은 불균형이 옥에 티다. 영화의 본고장 프랑스부터 유럽, 그리고 상업주의의 메카인 할리우드에 비해 모든 조건과 환경이 열악한 한국 영화의 가장 큰 경쟁력은 서사 구조에 있다. ‘게임의 법칙’(1994)이 ‘영웅본색’(1984) 못지않게 각광받을 수 있었던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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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한 욕심이 엿보이는 편집과 숙희라는 악녀 캐릭터의 설정은 물 흐르듯 매끈한 서사에서 살짝 비켜간다. 특히 지극히 냉정해야 할 숙희가 중상과의 상처가 아직 아물기도 전에 현수와 통속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로맨스 구조는 극의 균형을 무참하게 뒤흔든다.

숙희의 은인인 듯, 적인 듯했던 권 부장을 비롯해 숙희와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 양성소의 라이벌 김선(조은지) 등의 역할도 다소 아쉽다. 남자 주인공으로서 여성 관객의 ‘표심’을 좌우할 성준 역시 착한 남자인지, 나쁜 남자인지 퍼즐을 지나치게 일찍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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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줬을 것으로 예상이 가능한 뤽 베송의 ‘니키타’는 도덕성과 양심 그리고 사랑에 대한 고민의 서사가 빛난다. 정의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던 뒷골목의 '양아치'에서 인간미가 결여된 정부의 킬러로 거듭난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게 된다는 내러티브에서 ‘니키타’의 미덕은 충만하다. ‘악녀’는 그냥 재미에만 충실했으면 차라리 더 완벽했을 것 같은 아쉬운 여운을 남긴다. 굳이 ‘메기의 추억’을 빌려오면서까지 가족애와 멜로를 장치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스타일과 재미만큼은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만약 김옥빈이 없었다면 이렇게 엄청난 여성 액션 영화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들 정도로 그녀의 원 톱 활약은 단연 눈부시다. 공교롭게도 세계적인 섹시스타 갤 가돗을 앞세운 ‘원더우먼’과 일주일 시차를 두고 겨룬다. 123분. 당연히 청소년 관람 불가. 6월 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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