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하루>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타임 루프를 소재로 한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국내에서 469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운명은 죽게끔 정해져있고, 죽어야만 하루 전으로 되돌아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해야하며, 그걸 혼자만 알고 있다면 그 하루는 하루가 아니라 인생 전부일 것이다.

‘하루’(조선호 감독, CGV아트하우스 배급)는 ‘엣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외계종족의 공격으로부터 지구를 구한다는 거창한 할리우드 특유의 미국 영웅주의에 비교하면 턱없이 스케일이 작지만 서사의 울림만큼은 만만치 않다.

출세와 돈을 마다한 채 전 세계 분쟁지역을 돌며 정치와 종교를 떠난 히포크라테스적 봉사 인술을 펼쳐 저명한 준영(김명민)은 UN 인권포럼에 참석한 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다. 그에게 유일한 가족은 12살 딸 은정(조은형). 한창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할 은정은 큰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외국을 싸돌아다니느라 자신에게 소홀한 아빠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질 대로 팽배한 상황.

▲ 영화 <하루> 스틸 이미지

취재진이 공항으로 몰려들어 기자회견이 진행된다. “왜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그런 의료봉사활동에 모든 정성을 쏟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이 나올 즈음 준영의 후배에 의해 서둘러 회견이 정리된다.

오늘은 은정의 생일로 준영은 낮 12시를 약속해둔 터. 서둘러야 하지만 타고난 넓은 오지랖이 발목을 잡는다. 이동 중 한 소년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엄마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자 가던 길을 되돌려와 소년의 목에 걸린 사탕을 빼 살린다.

그리곤 승용차의 가속페달을 밟지만 영업용 택시가 도로 한쪽에 쌓인 벽돌더미를 들이받고 반파된 상태인 것을 목격하고 차를 세운다. 잠시 망설이다 이내 하차해 택시 뒷자리의 승객은 이미 사망한 것을 확인하곤 그나마 숨이 붙어있는 기사를 구하는 데 집중한다.

▲ 영화 <하루> 스틸 이미지

119구조대가 도착하고 한숨 돌린 준영은 자신을 기다릴 은정에게 전화를 거는데 전화기 속의 목소리는 낯선 남자. 그리고 목소리에 섞여 들리는 소음은 다른 쪽 귀로 스테레오로 전해진다. 바로 지근거리의 사람들이 모인 곳의 소음. 준영이 그곳으로 이동하니 은정이 처참하게 죽어있다.

그때 시각이 12시30분. 찰나에 정신을 잃은 다음 되찾으니 준영은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의 비행기 안에 앉아있고, 자신의 얼굴이 실린 뉴스위크지 표지에 사인을 해달라는 스튜어디스의 부탁부터 기자회견과 사탕 소년 등의 사건들이 도돌이표처럼 그대로 계속 반복된다. 그는 은정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계속 과속질주 하지만 번번이 12시를 넘긴다.

그런 불가항력의 비극이 거듭되던 어느 즈음, 은정의 주검 앞에서 넋이 나간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는 청년이 있다. “다른 사람은 그대로인데 왜 당신만 다른 거야”라고 울부짖는 이는 사설 구급차 운전기사 민철(변요한). 그는 가난하고 비전마저 안 보이는 자신을 사랑 하나만으로 믿고 결혼한 아내 미경(신혜선)과 어제 다퉜다. 미경은 아이를 갖자고 졸랐고, 형편이 안 되는 민철은 짜증을 내며 거부했다. 그런데 택시 뒷자리의 숨진 승객이 바로 미경. 민철 역시 준영처럼 타임 루프 안에 갇혀 고통을 이어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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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같은 두 사람은 신의 저주 같은 이 무능력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힘을 합쳐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기세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매번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막을 순 없다. 그렇게 지쳐서 미쳐갈 즈음 자신이 은정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강식(유재명)이 나타나 타임 루프의 저주를 영원히 풀 수 없을 것이라고 절망의 쐐기를 박는다.

앞선 타임 루프 영화들이 SF 액션 미스터리 등에 집중했다면 ‘하루’는 드라마가 강점이다. 초반 미스터리 스릴러로 흘러가던 흐름은 중반 이후 서스펜스로 변주되더니 이내 강렬한 최루성 드라마의 형태로 우뚝 서며 변신한다.

서사의 뿌리는 이기심과 분노다. 이기심은 양심과 방어기제로 변해 줄기를 타고, 분노는 줄기에서 또 다른 분노를 야기한다. 그렇게 더욱 강해진 복수심이 가지로 무성하게 뻗어나간 뒤 결국 그 위에 맺히는 열매는 반성과 용서와 이해와 희생이다. 이토록 강한 드라마적 메시지와 감동의 서사가 살짝 부족한 구조적 허점을 보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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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영화의 메시지를 담은 중의적인 표현이다. 매우 확연하게 다른 상류층의 하루와 빈민층의 하루가 결국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지난한 삶이란 위로다. 더불어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이나 소중한 것을 간과했거나 외면한 사람이나 불행하긴 마찬가지란 주장이다.

준영과 은정은 상류층이다. 은정이 친구들에게 아빠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람이라고 자랑하자 남자친구는 “울 아빠는 엄마한테 만날 쫓겨나서 유명한 동네적 저명인사”라고, 여자친구는 “울 아빠는 번번이 파출소에 잡혀가는 저명인사”라고 각자 얘기한다. 이 촌철살인의 메타포 혹은 알레고리라니!

준영은 UN에서 비즈니스 석 티켓을 끊어주고, 국가가 VIP 입국편의를 제공할 정도로 혜택을 받는 상류층이다. 비록 지금 당장 큰돈은 못 벌망정 명예를 누리고 있으며 향후 마음만 먹는다면 돈방석에 앉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은정에게 ‘왕따’ 당하는 신세다. 과연 그는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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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민철과 강식은 이른바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다. 매일 알람소리에 맞춰 일어나 온종일 일해 봐야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조차 쉽지 않으니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 오죽하면 남자가 2세를 안 갖겠다고 아내와 다툴까? 세 남자는 뫼비우스의 띠 속을 헤매는 시뮬라크르다.

미경은 민철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알바’를 하는 대학생이다. 아직 학생 신분에 준비도 없이 덜컥 결혼부터 한 미경이 무모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녀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꿈과 사랑을 믿는 천사 같은 여자다. 천박한 자본주의적 계산법에 따라 얄미우리만치 철저한 제도권의 틀에 맞춰가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믿고 동화적 시선을 지닌 사람 냄새 나는 진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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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영화 속 반복되는 ‘A day’인 동시에 삶에서 매우 중요한 ‘Time(일정기간)’ 혹은 ‘Timing(시기)’이기도 하고 일본어의 봄이나 새해가 비유하는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난)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의 ‘콘스탄틴’과 매우 닮았다.

같은 시간대의 수없는 반복 속에서도 미묘한 변화를 주는 김명민과 변요한의 디테일한 연기력은 절묘하다. 낯선 유재명은 연극으로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조은형에게선 ‘괴물’의 고아성과 ‘아저씨’의 김새론이 동시에 엿보인다. 90분. 15살 이상. 6월 1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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