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은 금자문자(가네코 후미코, 최희서)가 박열(이제훈)이 1922년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기고한 시 ‘개새끼’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록 권력자가 먹다 남은 것으로 연명하지만, 일제의 폭압에 지배당하지만, 그에 굴복하거나 빌붙지 않고 지조와 민족혼을 지키며, 주권을 되찾겠다는 이 은유적이면서도 원색적인 표현이라니!​

BC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르침을 받고자 아테네에서 노숙하는 디오게네스를 찾아와 “원하는 게 뭔가? 뭐든지 들어주겠네”라고 말했다. 대답은 “일광욕 좀 하게 비켜주시겠소?”였다. 디오게네스는 소위 ‘개똥철학’이라는 견유학파로 불린다. 그의 철학은 간단했다. “욕심 없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만족하며 살자”는 것. 즉 개처럼 유유자적하자!​

그가 문명 이래 최초의 아나키스트였다면 박열은 조선 최초의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다. 둘은 스스로 ‘개’임을 자처했다. 뿐만 아니라 삶도 그랬다. 박열에게선 그리스신화의 술과 축제와 기쁨과 광기와 부활의 신 디오니소스의 아우라마저 느껴진다. 이준익 감독은 그렇게 디자인했고, 이제훈은 그대로 재단했다.​

‘박열’의 무대는 조선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투쟁을 위해 조직한 불령사의 아지트인 어묵주점, 박열과 문자가 투옥된 감옥, 그리고 법정이다. 불령사는 주점에서 은밀한 작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술과 음식을 즐기며 토론하거나 사사로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사회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자들인 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현실은 암울하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디오니소스 축제다.

예심판사 다테마스(김준한)는 두 사람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 당당한 기개와 탄탄한 소신에 감복해 그들의 혼인신고를 돕고 결혼기념사진까지 찍어준다. 촬영 후 열은 다테마스에게 “모두 나가라”고 청한 뒤 문자와 마지막이 될 정사를 나눈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열은 15살 때 조선인 선생의 거짓교육 고백에 강렬한 민족주의와 독립의지를 장착한 뒤 사회주의를 거쳐 무정부주의자와 허무주의자가 된다. 그는 재판정에 자신을 죄인이 아닌, 조선의 대표자로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 판사를 향해 “일왕과 태자를 폭살하려 한 이유는 조선의 독립과 더불어, 왕실을 신격화함으로써 일본 민중의 고혈을 빨아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왕실과 정치권으로부터 민중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필리포스 대왕(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은 전쟁포로로 붙잡힌 디오게네스에게 “넌 누구냐?”라고 물었다. 대답은 “그칠 줄 모르는 당신의 탐욕을 지켜보는 사람”이었고, 왕은 바로 그를 풀어줬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해적에게 걸려 노예시장에 내걸린다. 그는 상인에게 당당히 “내가 주인이니 내 노예가 될 사람을 직접 고르겠다”고 주장해 한 사람을 지목한다.​

졸지에 노예를 모시는 노예가 된 주인 아닌 주인은 결국 디오게네스가 자식들의 훌륭한 스승이 되고, 집안을 일으켜준 데 감복해 그를 예우하고 풀어준다. 디오게네스는 아고라 광장에서 보란 듯이 자위행위를 한 적도 있다. 기득권을 지닌 기성세대가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관습과 규칙에 대한 조소와 경멸이 그의 취미였고, 다름의 다양성과 개성의 독창성이 그의 종교였던 듯하다. 열과 문자는 그 시뮬라크르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열은 문자에게 편지를 못 쓰게 만드는 등 인권유린을 밥 먹듯 하는 일제에 항거해 툭하면 단식투쟁을 벌이고, 문자는 무서운 죄수들을 동원해 강간하겠다는 간수의 협박에 옷을 벗어던지며 “너부터 들어와”라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스 정권에 취직이 됐다는 지인의 자랑에 “그가 던진 밥을 주워 먹는 돼지”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주점에 모인 열의 일행을 향해 닛폰도를 찬 일본인들이 “저 빨갱이새끼들 또 모여서 뭔 일을 꾸미냐”고 멸시하자 문자는 뜨거운 어묵국물을 쏟아 붓는다. 화난 그들이 발검해 위협을 가하자 열이 식칼로 물리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금과옥조였다. 한 사람이 디오게네스에게 “당신은 신을 믿기나 하냐”고 물었다. 사상검증이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디오게네스는 “내가 신을 안 믿는다면 지금 당신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질문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고 받아쳤다. ‘황산벌’에서 우리 민족의 오랜 편견인 동서갈등을 가볍게 풀어냈던 이 감독은 이제 명료한 역사의식과 철학관을 펼치는 강단을 표출한다.​

뻔한 소재와 주제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긴 파토스와 노스탤지어의 걸작 ‘라디오 스타’, 그 향수를 부모(혹은 엄마)로 이어 상대적 위로와 자유의 소중함을 웅변하며 애초부터 에토스나 로고스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양심선언을 한 ‘왕의 남자’, 올바른 역사관 정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사도’, 여기에 사상과 철학을 더한 ‘동주’는 매우 훌륭했다. 그런데 ‘박열’은 냉소적이지만 정열적이고, 허무적이지만 교훈적이란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6월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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