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웨스 앤더슨 감독은 영화 마니아들이 매우 선호하는 작가다. 파스텔 톤 위주의 화려한 비주얼과 디테일한 미장센은 블록버스터급 동화고, 플롯에 담긴 메시지는 아름답고 강렬한 철학이다. 그런데 관객들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에는 찬사 일색이지만 ‘문라이즈 킹덤’(2013)에는 다소 인색하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3겹의 구조로 돼있다. 1985년 한 유명작가(톰 윌킨슨)가 인터뷰를 하는데 그 내용은 1968년 그가 젊었을 때. 작가(주드 로)는 호텔 주인 제로 무스타파(F. 머레이 에이브러햄)와 저녁식사를 하며 1932년 이 호텔에 로비 보이로 입사한 그가 어떻게 소유주가 됐는지 길고 긴 얘기를 듣는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다.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이 호텔은 항상 부자들로 넘치는 유명 휴양 리조트다. 총지배인은 깐깐하기로 소문난 중년의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직원들에게 완벽한 서비스 제공의 원칙을 강요하는 그는 부자와 유명인사를 단골손님으로 거느려 호텔의 수입에 크게 기여하는데 사실 나이 많은 부잣집 부인이나 미망인들에게 육체적 쾌락을 제공하는 게 비결이다.

▲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 이미지

특히 그에게 사족을 못 쓰는 고객은 84살의 루츠 최고의 갑부 마담 디(틸다 스윈튼). 돌연 그녀가 죽었다는 전보가 날아오자 구스타브는 제로(토니 레볼로리)를 데리고 루츠로 향한다. 호텔 임직원들은 소유주가 누군지 모른 채 대리인 역할을 하는 코박스(제프 골드브럼)에게 분기별로 경영상태를 보고해왔는데 알고 보니 그는 마담 디의 변호사였다. 코박스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구스타브에게 남긴다는 유언을 읽는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마담 디의 외아들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는 이에 반발해 소송을 하겠다고 난리법석을 치고, 그 틈을 이용해 구스타브는 ‘사과를 든 소년’을 훔쳐 달아나 호텔 비밀장소에 은닉하고 열쇠와 비밀번호를 제로에게 맡긴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친다. 마담 디 독살혐의. 구스타브가 수감된 동안 제로는 멘들 빵집의 제빵사 아가사(시얼샤 로넌)와 사랑에 빠진다. 아가사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 구스타브는 제로와 함께 파란만장한 도주 끝에 결국 드미트리가 어머니를 독살했고,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마담 디의 전 재산을 물려받는다.

하지만 구스타브는 곤경에 빠진 제로를 도우려다 죽고 유언장에 따라 재산은 제로에게 상속된다. 제로가 세월이 흘러 손님의 발길이 끊긴 호텔을 꿋꿋하게 이어가는 이유다.

▲ 영화 <문라이즈 킹덤> 스틸 이미지

‘문라이즈 킹덤’의 주인공은 12살(한국나이로 치면 초등 6년 혹은 중1)의 샘(자레드 길먼)과 수지(카라 헤이워드). 고아인 샘은 위탁가정과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해 외로움이 극에 달한 상황.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세 남동생을 둔 장녀 수지는 가족 모두에게 불만을 품고 학교에도 친구가 없다.

이 둘이 우연히 알게 돼 첫눈에 서로에게 강하게 끌려 편지를 주고받는다. 샘은 수지와 그들만의 세상으로 잠적하기 위해 일부러 수지의 집에서 가까운 보이스카웃 캠프에 참가한다. 그리고 탈출해 수지와 상봉한 뒤 어른들의 추적을 피해 여정을 시작한다.

수지는 SF소설을 좋아하고 샘은 보이스카웃 대장이 인정할 만큼 캠핑능력이 뛰어나다. 자신들만의 문라이즈 킹덤을 발견하고 그곳에 베이스캠프를 친 둘은 낚시로 끼니를 때우고 밤이 되자 음악을 틀어놓고 춤도 춘다. 그리고 생애 첫 키스를 하며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행복은 다음날 아침 추적해온 어른들에 의해 깨진다.

▲ 영화 <문라이즈 킹덤> 스틸 이미지

위탁가정이 샘을 거부함으로써 그를 고아원에 보내기 위해 사회복지국에서 담당자가 나온다. 그러나 샘은 감옥 같은 고아원 입원을 거부하고 또 탈출을 감행한다. 샘과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부모의 눈을 피해 수지 역시 집에서 탈출해 샘과 만난다.

때마침 섬엔 전례 없는 폭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난리가 나고 샘과 수지는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시위를 한다. 결국 중년의 독신인 보안관 샤프(브루스 윌리스)가 샘을 입양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반대하던 사회복지국이 특별하게 허락함으로써 소년과 소녀에게 행복한 나날이 열린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장르적으론 코미디와 서스펜스를 가미했고, 장치로는 판타지가 넘실댄다. 서사구조가 뚜렷해 대중적 재미를 추구하는 관객들에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뼈대와 인테리어로 꾸며졌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자막이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점을 정리해준다.

▲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 이미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츠바이크는 나치를 피해 브라질에 정착했다 옛 유럽에 대한 향수를 못 잊어 결국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그는 역사에 남다른 통찰력을 지녔고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묘사했다는 호평과 함께 글이 가볍고 감정에 치우쳤다는 혹평도 동시에 받는다.

그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구스타브는 외견상 완벽한 인격의 소유자로 그려지지만 문란한 여자관계에서 보듯 사실 그의 무의식 속엔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 의해 생긴 또 다른 초자아가 심연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멘들 케이크와 파나쉬 향수에의 집착이 그런 무의식의 발로에서 기원한 것.

알프스 산 중턱의 낭만적인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란 제목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의 헤게모니가 무너지고 낭만과 풍요가 사라진 대신 미국과 소련(당시)이 패권을 쥐게 된 데 대한 안타까움이 깃들어있다.

▲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 이미지

그래서 경찰과 군대는 다분히 히틀러와 나치를 연상케 한다. 구스타브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제로는 터키나 인도 출신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전쟁고아이거나 유럽의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생아일 것이다. 그런 노스탤지어와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파토스(고뇌 정념 열정)나 미국식 페이소스(연민 슬픔)가 스크린 곳곳에 짙게 배어있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재미있다는 평가를 아끼지 않는 이유는 구석구석에 장치된 코미디와 유머다. 특히 드리트리 밑에서 일하는 킬러 조플링(윌렘 데포)은 빛나는 출연진 중 단연 최고의 신 스틸러고, 산꼭대기에서 도주하는 그와 그를 쫓는 제로와 구스타브의 스키 질주 신은 최고의 웃기고 재미있는 장면이다.

스타의 향연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주인공 외에도 에드워드 노튼, 빌 머레이, 마티유 아말릭, 하비 케이틀, 오웬 윌슨 등이 조연 혹은 카메오로 출연한다. 그래서 하녀 역할로 잠깐 등장하는 레아 세이두를 알아보기 쉽지 않을 정도.

▲ 영화 <문라이즈 킹덤> 스틸 이미지

‘문라이즈 킹덤’은 소외와 고독, 이해와 포용에 관한 영화다. 아이들은 어른 같고, 어른들은 아이 같다. 샘과 수지는 결혼식을 올리지만 아직 노총각인 샤프는 수지의 엄마와 부적절한 관계다. 수지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놓고 어필하지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든가 최소한 그 수준의 약점이 있는 것이다.

샘을 이단아 취급하던 보이스카웃 단원들은 뒤늦게 동지의식을 앞세워 도주를 돕는다. 이기적이었던 샤프는 모두가 꺼리던 샘을 입양함으로써 수지의 아버지에게 가진 양심의 가책 중 일부나마 덜게 된다. 더불어 그건 수지 엄마와의 이별을 알리는 양심선언이다.

앤더슨의 페르소나인 틸다 스윈튼, 빌 머레이, 에드워드 노튼, 하비 케이틀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앤더슨의 영화가 으레 그렇듯 전편에 걸쳐 음악이 아름답지만 특히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오케스트라의 변주 합주 솔로 등이 강렬하다. 이해와 포용을 통한 화해 혹은 화합이다. 두 영화의 호오에 대한 판단의 주체는 당연히 관계자가 아니라 소비자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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