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리얼’(이사랑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의 인트로는 마치 ‘007’ 시리즈처럼 약간 환각적 효과를 준다. 더불어 전개되는 몽환적이고 기괴스러우며 환락적인 스타일은 가스파 노에 감독의 극도의 격앙된 폭력과 섹스로 점철돼 극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은 ‘돌이킬 수 없는’을 보는 듯한 현기증을 유발한다.

대규모 카지노 시에스타 소유주 장태영(김수현)이 신경정신과 의사 최진기(이성민)와 상담 중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극도의 잔인한 폭력성을 드러낸 그는 결국 사람을 죽이고 일찍이 깡패가 됐지만 대학까지 졸업했을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지녔다.

한마디로 문무를 겸비한 그는 그러나 해리성 기억상실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그의 안에는 또 다른 자아가 하나 더 있다. 프리랜서 르포 기자다. 태영의 고통과 괴로움의 근본은 바로 그 기자였다.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공생관계인 국회의원 최낙현(김홍파)이 꼼수를 부린다. 중국 출신 조폭두목 조원근(성동일)을 카지노 경영에 끌어들인 것. 태영의 지분을 현금으로 인수한 원근은 태영에게 얌전히 자기 밑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고 큰소리를 친다.

태영은 일단 내면의 기자부터 없애는 작업을 한다. 진기는 그 내면을 죽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을 죽이면 된다는 방법을 제시한다. 때맞춰 병원에 심각한 교통사고로 곧 죽을 것이 확실한 환자가 들어오고 기자로 바뀐 태영은 환자의 목을 조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죽었어야 할 환자가 멀쩡하게 살아난다.

환자의 영혼이 죽은 몸 안에 기자의 인격이 들어간 것. 이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몸을 갖게 된 기자는 죽은 자의 엄청난 재산을 이용해 깡패 태영에게 복수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그는 우선 변호사 사도진(김우진)의 도움을 받아 깡패와 똑같은 얼굴 목소리 신체구조 등으로 변신한다.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그렇게 몸과 얼굴이 거의 완벽해진 기자는 깡패 앞에 나타나 자신이 투자해 원근으로부터 시에스타를 지켜주겠다고 한다. 원근의 마약제조 및 밀매사업을 세상에 까발림으로써 기자로서의 공적을 올리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게 조건이다.

그렇게 깡패는 시에스타를 지키고, 기자는 원근의 마약공장을 세상에 공개해 상을 받는다. 깡패는 진기의 병원에서 일하는 재활치료사 송유화(최진리)와 내연의 관계다. 기자와의 저녁식사 자리에 유화를 대동한 깡패는 나타난 기자와 그의 여자친구를 보고 엄청나게 불쾌해진다. 그들이 자신과 유화와 똑같은 옷과 액세서리를 하고 나타났기 때문.

자신의 흉내를 내는 기자에게 분노한 깡패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기자의 도발은 그치지 않는다. 그러자 깡패는 경찰을 피해 잠적한 원근에게 전화해 그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기자인데 그를 넘기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원근은 기자와 그의 여자친구에게 총을 쏜 뒤 유화를 납치해가며 깡패에게 기자의 배후인물인 러시아 조폭두목 세르게이까지 넘기라고 협박한다.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기존 한국의 극장상영용 장편상업영화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스타일인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액션누아르 장르라고 하지만 누아르적 비장미는 찾아보기 힘들고, 액션은 강렬하지만 비중이 적다. 후반부의 발레액션은 뜬금없긴 하지만 중국투자사 알리바바에 대한 감사표시라고 보면 애교스럽긴 하다.

굳이 장르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멜로 액션 미스터리 스릴러 등이 뒤범벅됐고, 약간의 판타지까지 가미됐다. 말미엔 마치 ‘공각기동대’를 오마주하는 듯하다. 콕 집어 정리하자면 블록버스터 컬트 무비다. 서사는 장황하고 철학적이며 심오한 심리학적이지만 구조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애초부터 컬트를 염두에 뒀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그러기엔 김수현이란 톱스타가 아깝다.

보도자료는 대놓고 미국의 현대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H. 매슬로우의 철학을 담았다고 웅변한다. 매슬로우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로서 ‘생리-안전-애정 공감-존경-자아실현’이란 인간의 욕구를 정립한 욕구5단계설로 유명하다.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영화는 정체성과 공포를 소재로 자아 찾기를 통한 자아실현에 대한 심리학을 파고드는 가운데 그 철학에 사랑이란 양념을 살짝 버무렸다. 이 점에선 확실히 기존의 다중인격 영화와는 차별화를 꾀한다. 어떤 내가 진짜인지를 혼동하는 설정은 마치 가상공간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매트릭스’를 연상케 한다. ‘장자’의 ‘제물론’ 편에 등장하는 ‘호접몽론’이 말하는 물아일체에 대한 질문이다.

태영이란 육체 안에 든 두 인격체는 서로를 각기 달리 본다. 기자는 깡패를 동경해 그가 되고자 자기최면을 건다. 남의 몸에 들어간 뒤 깡패와 똑같이 성형수술을 하고 그의 말투와 버릇은 물론 섹스형태까지 따라한다.

깡패는 온몸이 흉터와 문신투성이지만 자신의 육체를 매우 사랑한다. 대놓고 자랑할 정도로 경건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 신성불가침의 지역에 침투한 기자를 경멸하다 못해 죽이려 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핵심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반대해 의지를 통해 자신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 영화 <리얼> 스틸 이미지

기자는 타고난 반사와 경험적 조건반사에 주목한 행동주의심리학의 표상이다. 이카로스 콤플렉스. 깡패는 경험이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정신분석학의 대체다. 유화와 요나 콤플렉스를 공유한다. 매슬로우가 반박했던 두 학문의 이론을 이중인격의 결정체로 그림으로써 감독은 ‘이 세상에서 진짜란 무엇인가, 있기나 한 걸까’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철학적 출발과 김수현이란 값비싼 재료의 쓰임새가 부조화였다. 여기에 다양한 인물들을 개입시켜 복잡한 내러티브를 엮다보니 한식도 일식도 중식도 아닌 국적불명의 복잡하고 미묘한 맛을 내는 어정쩡한 요리가 돼버렸다. 단, 1인2역을 해낸 김수현의 연기력 하나만큼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이중 캐릭터 연기를 뛰어넘는 상전벽해다.

이 영화에서 ‘별에서 온 그대’에서 김수현이 보여준 애교나 유머를 기대하면 오산이다. 폭력은 하드고어에 가깝고, 성적 수위는 꽤 높다. 영화에서 마약은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스크린은 마치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하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오픈 유어 아이즈’와 폴 버호벤 감독의 ‘토탈 리콜’도 연상된다. 그래서 제목이 ‘리얼(진짜)’보단 ‘시에스타(낮잠)’가 더 어울릴 법도 하다. 137분. 청소년 관람불가.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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