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친정 마블 스튜디오로 되돌아와 시작된 첫 얘기 ‘스파이더맨: 홈 커밍’(이하 ‘홈 커밍’)의 흥행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 5일 개봉 때부터 선두를 치고 달리더니 7일부터 9일까지 260만여 명을 동원하며 누적 관객 수 356만579명을 기록했다.

벌써부터 국내 유일한 1000만 관객 동원 슈퍼히어로무비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기록을 내다볼 정도다. 존 왓츠 감독과 톰 홀랜드 주연이라는 다소 생소한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폭발적인 흥행세력을 보이는 비결은 뭘까?

물론 이렇다 할 경쟁작, 특히 한국영화의 대응이 약한 건 사실이다. ‘박열’(이준익 감독)이 ‘홈 커밍’의 뒤를 이어 흥행 중이긴 하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적 성격이 강하다. 시리즈의 동력이 다했음을 입증한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의 부진도 무시할 수 없다. 내달 15일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 개봉되기 전까지 독주는 가시권이다.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현재 국내외 정세는 굉장히 혼란스럽다. 북한의 핵위협과 이에 공동 대응하는 대부분의 국가, 동조하는 듯하면서도 자신의 주판알을 튀기는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라크의 모술 탈환 등 잔존한 중동의 분쟁! 이 와중에 획기적인 정권교체로 다수가 희망을 갖는 게 우리나라의 분위기다.

지난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국정농단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은 파격적인 픽션에 자극을 받지 않을 만큼 내성이 강해졌다. 웬만한 영화는 흥미를 느낄 수 없다. 탄핵정국 등 긴박한 상황을 지나오면서 잔뜩 긴장했다가 이제 이완됐기에 팽팽한 스토리는 피곤하다. 따라서 평이한 재미가 좋다.

그런 면에서 ‘홈 커밍’은 ‘딱’이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기승전결을 따르니 피로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약간의 텐션은 필수적 재미다. 왜? 어차피 ‘권선징악, 해피 엔딩’이니까. 스토리가 매우 단순하다. 어벤져스의 내전 때 아이언맨(토니 스타크,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발탁돼 캡틴 아메리카에게 도발했던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시빌 워’가 끝나자 일상으로 돌아와 평범한 고교생으로 살아간다.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유일한 가족인 메이 숙모에겐 토니의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인턴사원으로 발탁됐다고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친구 네드(제이콥 배덜런)의 “너 어벤져스니?”라는 물음엔 “곧”이라고 답할 정도로 당장이라도 토니의 부름을 받고 어벤져스에 합류할 것이라 착각한다.

‘어벤져스’ 때 지구를 침공했던 외계 치타우리 족의 잔해를 처리하는 공사를 했던 아드리안 툼즈(벌처, 마이클 키튼)는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이 일을 빼앗긴 뒤 토니에게 앙심을 품는다. 몰래 챙긴 치타우리의 강력한 무기를 이용해 큰돈을 벌더니, 아예 자신이 벌처라는 초능력 악당이 돼 나선다.

벌처와 그 일당들의 악행을 목격한 피터는 토니가 선물한 첨단 슈트를 입고 뛰어들었다 혼쭐이 난다. 토니는 나대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끝내 벌처 일당과 목숨을 건 마지막 대결을 벌여 결국 영웅으로 거듭난다는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무협지 스토리.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액션만 놓고 본다면 사실 ‘어벤져스’와 상대가 안 된다.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3부작(2002~2007)과 마크 웹 감독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부작(2012~2014)과 비교해도 별로 놀라울 게 없다. 그래서 왓츠 감독이 선택한 노선은 현실성이다.

전작들은 피터의 생체 내에서 분비된 초능력거미줄이 손목부분에서 그의 의지에 의해 발사됐다. 항문도 아니고. 그러나 여기선 과학적으로 만든 인공거미줄을 웹 슈터란 기계에 장착한 뒤 조작해 발사한다. 물론 과용하면 고갈된다.

그런 사실성이 줄일 흥미를 보완하기 위해 토니의 첨단기술을 빌려왔으니 바로 첨단 스파이더맨 슈트다. 아이언맨의 AI인 자비스나 프라이데이처럼 스파이더맨의 슈트는 캐럿이란 인공지능이 통제하고 피터에게 교육을 시킨다. 아이언맨 슈트만큼은 아니지만 특별한 신체적 능력을 지닌 피터에게 맞춤형으로 다양한 기능과 무기를 보유한 채 피터의 능력상승에 따라 기능도 업그레이드된다.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뭣보다 강점은 전편들이 정체성과 행위의 정당성, 도덕성 등으로 고뇌하며 어두웠던 데 비해 시종일관 경쾌하고 젊어졌다는 것. 피터는 어벤져스로서의 활약을 셀피로 찍어 SNS에 올리는가 하면 짝사랑하는 리즈(로라 해이어)가 주최한 파티에서 그녀에게 어필할까, 악당을 잡으러 출동할까 고민하는 청소년과 성인의 중간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유머는 거의 ‘데드 풀’ 수준이다. 다만 ‘화장실 유머’는 최대한 배제했다는 점. 대신 메이 숙모가 다소 보완해준다. 지난 시리즈에선 그냥 옆집 할머니 수준이었던 메이가 이번엔 관능적이다 못해 다소 퇴폐적이고 거칠게 그려진다. ‘What the f...’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가 하면 피터에게 폭력도 행사한다.

네드는 틈만 나면 ‘Awesome’이란 단어를 내뱉는다. 요즘 우리 청소년의 유행어로 바꾼다면 ‘대박’이다. 한 여학생은 “토르랑 자고, 아이언맨이랑 결혼하며, 헐크는 죽일래”라고 슈퍼히어로에 대한 여성들의 은밀한 생각을 대변한다. 악당들이 어벤져스 가면을 쓰고 은행의 현금자동지급기를 터는 것을 보고 피터가 뛰어들자 사람들이 “지금 은행에서 스파이더맨이랑 어벤져스랑 싸우고 있어요”라고 떠든다.

학교에서 교사가 교보재로 채택한 특별강의 동영상 속 주인공은 캡틴 아메리카다. 그는 “나 몇 편 남았지”라고 묻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쿠키영상에 등장해 관객들에게 유쾌한 ‘엿’을 먹인다.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꽤 진지한 대사도 있다. 벌처는 “힘 있는 부자는 제멋대로 살고, 우린 그들이 먹다 흘린 부스러기를 먹고 살지”라고 자본주의의 폐단을 꼬집는다. ‘큰 힘엔 큰 책임이 뒤따른다’는 예전의 명대사는 토니의 “슈트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더 가지면 안 돼”라는 또 다른 책임론으로 바뀌었다.

아직 인격이 완성되지 않은 철부지 소년의 치기와 그에 따른 어설픈 활약이 넘실대지만 어른에 대한 비판도 갖췄다. ‘아이언맨’에서 부와 지식과 지성 그리고 섹시함을 자랑하던 자유로운 영혼 토니는 여기선 완전히 ‘잔소리꾼 꼰대’다. 내내 피터에게 ‘하지 마’로 일관한다.

처음 피터를 만난 아드리안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꾸 페드로라고 부른다. 피터는 성서의 베드로다. 언어의 유희! 백인우월주의도 없다. 리즈는 흑인, 네드는 인디언, 교장은 일본인, 학생들은 인도인 등 다양한 인종이다. 다인종국가인 미국을 화이트 워싱(더러운 곳 가리기, 혹은 백인 캐스팅) 없이 제대로 그렸다.

▲ 영화 <사도> 스틸 이미지

철학까지 갖췄다. 이준익 감독은 ‘사도’를 헤겔의 변증법 논리의 3단계인 ‘정립-반정립-종합’의 이론 위에 완성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규칙 법칙 정도 왕도 등을 고집하는 정립의 영조에 엄발나는 행보를 보인 사도는 반정립이다. 고집스런 직관(영조)과 예술적인 철학(사도)의 충돌은 정치란 명목으로 이성을 뒤주에 가뒀다.

결국 영조의 객관화된 희망을 완성해주고, 사도의 주변화된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불명예를 회복시켜주는 종합은 정조였다. 영조의 욕심의 용틀임과 사도의 번뇌의 몸부림이 빚은 충돌로 인한 역사의 상처를 정조라는 이성이 봉합해준 것.

토니는 이기적이고 일방적이다. 피터를 끌어들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하는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미완성인 피터를 험악한 세상에 방목하면서도 ‘하지 마’만 남발한다. 스스로 어벤져스의 자격을 갖추게끔 성장해가도록 자아를 인정해주는 듯하지만 그건 방치다. 그럴 거면 애당초 교육적 방임 차원에서 ‘시빌 워’에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옳았다.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그런 ‘영조’에 ‘사도’인 피터가 반항하는 건 당연지사. 사도가 그랬듯 피터는 ‘아버지’인 아이언맨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 스파이더맨으로서의 공적을 쌓으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생각은 짧고, 작전은 손자병법의 ‘ㅅ’도 모르며, 공격력은 만만하게 보는 호크 아이만도 못한 그가 뭐 하나 제대로 해낼 리 만무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두 사람의 갈등을 봉합시켜주고 피터의 인격을 완성시켜주는 ‘종합’은 빌런인 아드리안이다. 그의 악행과 배려의 양극단의 행동은 피터에게 ‘힘에 따른 책임’과 ‘슈트를 입을 자격’을 가르쳐주는 결과를 야기하고, 그럼으로써 피터는 당당하게 자립하며, 토니는 자신의 의지와 능력의 치외법권에서 스스로 급성장한 피터에게 ‘항복’을 인정한다.

‘아이언맨’에서 토니는 자신의 회사에서 생산한 무기를 구매한 중동의 테러조직에 붙잡힌다. 그에 비하면 아드리안의 범죄는 지극히 국지적이다. 참으로 잔인한 유머다. 또한 마이클 키튼은 DC의 ‘배트맨’의 배트맨이었으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2014)의 버드맨이었다. 벌처는 독수리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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