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4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간한 회고록에 ‘민간인 학살이 없었고, 발포 명령자도 없었다. 광주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군인들을 살해한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없다’고 쓴 데 대해 수많은 국민들이 공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전두환의 행적에 대해 1997년 ‘내란목적살인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영화 ‘택시운전사’(장훈 감독, 쇼박스 배급)는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다. 주인공은 ‘변호인’으로 박근혜 정권에 블랙리스트로 ‘찍힌’ 송강호다. 평소 개념이 확실하고 소신이 강직한 배우로 소문난 송강호의 ‘사도’와 ‘밀정’으로 입증된 절정의 연기력도 기대치를 높인다.

1980년 5월. 일본 도쿄에 파견근무 중인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는 대한민국 광주의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듣고 급히 김포공항을 통해 내한한다. 서울의 개인택시 운전기사 만섭(송강호)은 아내를 잃고 11살 외동딸 은정(유은미)과 단 둘이 산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동료 기사 동수(고창석)의 집에 사글세로 사는 그의 전 재산은 택시. 그렇잖아도 먹고살기 힘든데 시내에서 툭하면 대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져 곳곳의 교통이 마비되는 통에 벌이가 시원치 않다. 결국 집세가 10만 원이나 밀린 상태. 기사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옆 테이블의 회사택시 기사들이 한 외국인으로부터 10만 원에 광주 왕복운행 의뢰가 왔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갑자기 만섭은 밥숟가락을 내던지고 국도극장으로 내달려 그 손님을 낚아챈다. 그는 바로 피터. 광주의 상황도, 피터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저 통금시간 전까지 서울로 되돌아오면 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만섭은 광주 입구에서 바리게이트를 친 무장군인들에게 제지당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도시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분명히 대한민국의 여느 도시들과 다를 바 없는 곳이라 여겼던 광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통금시간은 오후 9시였고, 도시는 전쟁터와 별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트럭 한 대. 짐칸엔 시위대가 있었고, 자신들을 찍는 피터를 본 시위대는 관심을 표한다. 일행 중의 한 명인 대학생 재식(류준열)이 통역을 맡아 피터를 돕는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그들이 향한 곳은 병원. 만섭은 비로소 광주의 실상을 알아간다. 현지 택시기사 태술(유해진)이 친절을 베풀어 그날 저녁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잠까지 재워준다. 처음엔 10만 원이란 거금에 혹해 광주행을 택했던 만섭은 철부지 대학생들의 시위에 짜증을 내다가 자신의 세뇌된 고정관념이 얼마나 잘못됐는가를 깨달아간다.

더불어 돈벌이로만 여겼던 피터의 사명감에 동화돼 선불로 받은 요금까지 되돌려주며 그를 돕지만 결국 혼자 있을 어린 딸 생각에 합의하에 피터를 광주에 남겨둔 채 서울로 진로를 옮긴다. 그 와중에 시위대에 침투해 첩보활동을 벌이던 사복 특공조장이 피터와 만섭의 존재를 알아채고 그들을 추적한다.

영화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혹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일부러 감동을 유도하거나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오류와 다른 노선을 걷는다. 작품이 집중하는 곳은 기자와 기사라는 거의 유사한 글이지만 업무는 전혀 다른 두 직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진리와 인권을 향한 사명감과 정의감이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대다수 국민들은 당시의 참상을 글과 말로만 봤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아닌 이상 진실을 목격하기 힘들었다. 철저하게 언론과 언로가 통제된 채 노태우 정권 때까지 눈과 귀와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최대한 자극을 배제한 채 전두환 정권의 만행과 군인들의 무감각한 잔혹행위를 그림으로써 얄팍한 프로파간다와 거리를 둔다.

태술은 “왜 운행을 안 하냐”는 질문에 “기자가 기사를 안 쓰는데 기사가 운전을 안 하는 게 뭐 어떠냐”고 한다. 이는 말장난 같지만 언론에 대한 통렬한 메타포이자 권력이 언론을 장악할지라도 결국 진실은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독재 파시즘의 파멸에 대한 알레고리다.

중앙 일간지들이 광주의 현황을 ‘빨갱이와 깡패 등 불순분자 세력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왜곡하고, 광주 지역신문들은 1면을 백지로 발행하자 지역신문의 최 기자(박혁권)는 현장사진을 촬영한 뒤 이를 1면에 싣고 실상을 제대로 리포팅한 기사를 담아 발행하려다 부장에게 저지당한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신문 폐간 당하는 꼴 보려냐’는 부장의 호통에 ‘기자가 진실을 담은 기사를 써야한다’고 울부짖는 최 기자는 남의 나라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전쟁터와 다름없는 곳에 뛰어든 외국기자 피터에 비해 비겁하고 비열한 당시의 한국 언론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영화의 주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톨스토이는 동명의 단편소설을 통해 ‘사랑’이라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결론내린 바 있다. 장 감독은 톨스토이와 맥락을 공유하면서도 ‘멸공사상’이란 광신교적 정신착란이 전 국민을 마취시켰던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을 대입해 휴머니즘을 넘어서 실존주의를 웅변한다.

박정희 정권 중기 젊은이들이 어리석게도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 ‘한몫’ 단단히 쥔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면 후기에는 가장들이 중동개발 붐에 가운을 걸었다. 만섭도 사우디아라비아에 다녀온 데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세뇌에 길들여져 우리나라가 최고로 살기 좋은 나라라고 자족하며 산다. 그는 시위대에 의해 길이 막히자 “대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왜 저 짓거리냐”고 혀를 끌끌 찬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이어 그는 “먼지가 펄펄 나는 사우디에 한 번 가봐야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걸 알지”라고 푸념을 한다. 그런 그의 눈에 비친 광주 대학생들도 처음엔 마찬가지로 ‘비싼 등록금을 탕진하는 철부지’였다. 그런데 재식이 “전 공부하려고 대학 간 게 아니라 대학가요제 참가하려고 간 건데요”라고 어이없는 대답을 하자 비로소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최소한 알고자 하는 노력을 시작한다.

“택시가 사람 골라 태우냐?”와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라”가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키워드다. 만섭이 터무니없는 ‘콩글리쉬’를 구사하는 것마저 능숙한 영어라고 속아 넘어가는 광주 택시기사들을 설정했듯 당시의 택시 운전기사는 교육과 지성에서 소외된 계층이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다양한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걔 중에는 의외로 시사나 상식에 바르거나 밝은 기사도 나타나기 마련.

만섭은 철저하게 전자에 속했다. 아주 평범하거나 정권에 매우 알맞게 길들여진 노예였다. 그리고 그는 정권이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돈의 논리를 따르는 돈의 노예였다. 파시즘과 민족분단의 아픔을 먼저 겪은 독일인 피터의 눈에 당연히 그는 개나 돼지로 보였다. 그래서 피터는 먼저 요금을 주고 만섭을 쫓아내려 했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하지만 만섭은 우리 민족이 굴종의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자주권을 쟁취해 민주주의를 일궈냈듯 선지자는 아닐망정 자각자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혀를 끌끌 차던 그가, 돈에 눈이 멀어 선불을 받고 서울로 도망치던 그가 목숨을 걸고 앞장서 부상자들을 구해주는 객관화의 과정은 바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결론이다. 택시가 사람을 골라 태우지 않듯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든 죽일 권리가 없고, 다친 사람은 마땅히 구해줘야 한다.

그런 사람 중심의 사회, 인권 위주의 국가를 이루는 첨병은 올바른 언론이다. 할 말을 해야 하고, 옳은 말만 해야 하며, 부조리와 불법과 부정에 대해 절대 눈감지 않는 기자가 존재하는 한 사회는 건강해진다는 게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라’다. 지금까지 그렇지 못한 사례가 많아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였었고, 국정농단사태가 발생한 것이라는 은유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그 증거는 만섭이 마지막으로 손님을 태우고 향하는 곳이 ‘촛불광장’이라는 데 있다. 톨스토이는 젊었을 때 섹스와 도박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 말년에 기독교적 아나키즘에 푹 빠져 금욕과 비폭력 사상 설파에 전념했다. 그리고 영국 식민지 남아프리카에서 인권운동을 펼치던 한 인도 변호사와의 서신교환을 통해 그에게 비폭력저항 사상의 영향을 끼쳤다. 고국에 돌아가 샤티아그라하(진리주장) 운동을 펼친 마하트마 간디다.

피터와 만섭은 톨스토이와 간디를 연상케 한다. 영국의 정치학자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는 태생적으로 여우였지만 스스로 고슴도치라 착각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격언은 ‘여우는 잡다한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굵직한 것 하나를 안다’고 했다. 벌린은 이에 착안해 위대한 작가를 여우형(평생 다양한 사실을 추구)과 고슴도치형(평생 단일한 원칙을 고수)으로 나눈 바 있다. 피터가 톨스토이고 만섭이 간디거나, 아니면 정반대일 수도 있지만 만섭이 고슴도치에서 여우로 바뀐 것만큼은 맞다. 손수건 지참 필수. 137분이 결코 길지 않다. 15살 이상. 8월 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