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집으로 가는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는 참으로 오묘한 콘텐츠다. 영화배우의 운명 역시 애매하다. 여러 조합이 좋아 흥행이 성공할 듯하던 영화가 어이없게 망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가 하면 주인공을 제치고 엉뚱한 배우가 급부상하기도 한다. 흥행실패의 책임이 주연배우에게 전가되는 일도 부지기수.

배급사 제작사 감독 등 제작진은 캐스팅에 최고로 집중하고, 배우 역시 작품선택에 ‘갑질’ 논란을 일으킬 만큼 까다롭다. ‘인사가 만사’라는 얘기는 비단 기업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모든 조직과 사회 내의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전도연과 고수. 4년 전 여배우 방은진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 비운의 부부로 출연해 185만여 명의 관객을 울렸다. 조각 같은 얼굴의 고수, 연기라면 대한민국 현역 여배우 중 최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전도연의 흥행력은 거기까지였다.

▲ 영화 <무뢰한> 전도연 스틸 이미지

전도연은 ‘무뢰한’(2014) ‘협녀, 칼의 기억’(2015) ‘남과 여’(2015) 등으로 연속해서 체면을 구겼고, 고수는 ‘상의원’(2014) ‘루시드 드림’(2016) ‘석조저택살인사건’(2017)으로 내리 참패했다. 559만여 명을 동원한 ‘덕혜옹주’에서 고수는 카메오에 불과했다.

전도연이 흥행을 맛본 건 305만여 명의 ‘너는 내 운명’(2005), 제60회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식에 힘입어 뒤늦게 극장 문턱이 닳은 171만여 명의 ‘밀양’(2007), 역시 칸 경쟁부문 진출로 화제를 모아 230만여 명 동원에 성공한 ‘하녀’(2010) 정도였다. 하정우와의 조합으로 화제를 모은 ‘멋진 하루’(2008)는 39만여 명, 정재영과 불꽃 튀는 연기대결을 펼친 ‘카운트다운’(2011)은 47만여 명에 불과했다.

216만여 명의 ‘초능력자’(2010), 294만여 명의 ‘고지전’(2011), 247만여 명의 ‘반창꼬’(2012) 등으로 최소한 본전 이상은 하는 배우였던 고수는 79만여 명의 ‘상의원’(2014)으로 성적표가 뚝 떨어진 뒤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작품선택능력 탓일까, 아니면 한때의 불운 때문일까?

▲ 영화 <집으로 가는길> 스틸 이미지

물론 배우의 값어치를 평가할 때 관객동원 숫자만으로 재단해선 곤란하다. 적지 않은 배우들이 구도자 혹은 예술가의 입장에서 작품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진중한 자세를 천박한 상업적 잣대로만 평가한다면 전위예술가는 그냥 미친놈이거나 외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상영용 장편상업영화는 커다란 자본이 들어가고 심지어는 ‘개미’ 투자자의 쌈짓돈까지 빨아들인다는 점에선 자본주의의 공식이 반드시 적용되므로 배우와 감독 등은 흥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가능하면 많은 관객과 소통하는 게 직업적 서비스정신의 근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배우가 일부러 흥행이 안 되는 작품만 골라 선택하는 일은 절대 없다는 뜻이다. 만약 ‘동주’나 ‘박열’의 감독이 이준익이 아니었다면 강하늘이나 이제훈이 선뜻 출연을 결심했을까? 송강호가 봉준호 감독이 아니었다면 ‘기생충’의 시나리오도 안 보고 ‘예스’라고 했을까?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이준익은 별로 돈을 안 들이고 짭짤한 수익도 올리면서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내는 대표적인 상업적-이런 아이러니라니!-독립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봉준호는 큰돈을 들여도 손해를 안 나게 하면서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영특한 감독의 대명사다. 둘 다 흥행감독이란 의미다.

배우라면 유력영화제를 겨냥했거나, 개인적으로나 대의명분 측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품을 만한 작품이라면 흥행성과 상관없이 선뜻 선택할 수 있다. 예술적 취향이 강한 배우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인 중에도 그럴 수 있다. 초창기에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겠다는 미래지향적 의도에서, 혹은 주목받는 감독의 작품이라면.

그러나 아무래도 신인은 하루라도 빨리 성장하기 위해 되도록 많은 관객에게 노출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흥행작이 최우선 목표이기 마련. 조우진이 ‘내부자들’에서 이병헌과 맞붙는 임팩트 강한 역할을 맡지 않았다면 그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까?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조진웅 마동석 곽도원 김성균 등 주연 같은 조연배우를 무려 4명이나 발굴해냈다. 정상의 주연배우라면 하산할 일만 남았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 영화 <접속> 스틸 이미지

전도연은 MBC ‘우리들의 천국’(1990~1994)으로 본격적인 연기생활을 시작해 ‘종합병원’ ‘젊은이의 양지’ 등으로 활발한 활약을 펼쳤지만 ‘별은 내 가슴에’(1997)를 끝으로 브라운관을 떠나 그해 개봉된 영화 ‘접속’으로 흥행력과 연기력을 동시에 인정받은 뒤 한동안 충무로를 고수했다. 당시 충무로의 남녀 투톱은 ‘접속’의 한석규와 전도연-한때 MBC ‘전속’ 배우?-이었다.

전도연과 고수의 흥행부진이란 결과는 같지만 원인은 좀 다르다. 전도연은 결혼과 출산이란 행복을 경험했고, 오랜 ‘충무로 퀸’이란 무게가 짓누르는 피로도가 쌓였음이 역력하다. 개인적으로 비슷한 상황의 전지현과 김희선이 미혼 때에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것과 내용은 다르다.

전지현과 김희선은 미혼 때 항상 연기력 논란에 시달렸고, 그건 인생의 큰 경험을 하고난 뒤인 지금도 별로 다름없다. 어쩌면 그게 그녀들을 더 편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더 발전할 여지가 남아있고, 정에 약한 우리 국민의 정서상 육아와 활동을 병행한다는 데서 동정표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심리가 마음의 안정감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 영화 <집으로 가는길> 스틸 이미지

반면 전도연은 항상 쫓겼다. 그녀는 전지현이나 김희선처럼 미모로 승부를 걸었던 게 아니라 배우 자체의 힘, 연기력과 작품선택능력으로 우월함을 뽐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젊은 후배들의 도전을 매번 받으며 치열한 전투를 치러왔고, 이제 누적된 과로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지친 것이다.

더구나 작품을 안 하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이 안락하고 행복한 가정이란 공간이 있으니 전투력이 많이 상실됐을 게 뻔하다. 그런 여러 가지 영향이 작품선택에서 매의 눈이었던 전성기의 시력을 떨어뜨리게 만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물론 치열한 투쟁심리도 완화됐을 것이고 그게 눈을 흐리게 만들었을 수 있다.

고수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그는 아직까지 내놓을 만한 이렇다 할 대표작이 희미하다. 2001년 드라마 ‘피아노’로 스타덤에 올라선 후 3년 만에 영화 ‘썸’의 단독 주인공을 맡았지만 34만여 명이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쥔 이후 그는 이병헌 혹은 김민종 신드롬을 앓는 듯하다. 전도연과 같은 결혼과 출산이지만 그는 가장이란 게 다르다. 전도연이 관성 혹은 예술 활동이라면 그는 그와 더불어 치열한 생존이다.

▲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스틸 이미지

이병헌과 김민종은 안방극장에서 단숨에 스타덤에 올라선 후 쉽게 충무로로 진출했지만 출연하는 작품마다 흥행에 실패하면서 스크린 공포증이 생겼다. 가장 연예인답지 않은 연예인으로 불릴 만큼 털털한 성격에 인간미가 풀풀 넘치는 김민종이지만 영화에 관한 유머만큼은 민감하다.

이병헌 역시 그런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조심스레 입에 문 시나리오가 바로 ‘공동경비구역 JSA’였고 이를 통해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캐스팅 1안은 이병헌이 아니었다. 이정재가 거부하자 할 수 없이 시나리오가 이병헌에게 넘겨진 것이었다. 송강호의 역할도 원래는 최민식이었다. 영화의 오묘함!

고수가 드라마에는 비교적 안정감을 갖지만 영화는 지나치리만치 신중하다는 그림이 쉽게 연상된다. 최근 연달아 실패한 작품을 보면 그 그림은 더욱 선명해진다. ‘루시드 드림’은 자각몽이라는 특이한 소재의 SF스릴러고, ‘석조저택 살인사건’은 원작소설의 작품성과 흥행성이 이미 검증된 미스터리 스릴러다.

▲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 스틸 이미지

파트너 역시 고수와 김주혁이라는, 연기력과 흥행력을 믿을 만한 선배다. 고수 입장에선 최소한 작품이 형편없다는 비난은 피할 수 있고, 어느 수준의 흥행은 보장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갖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상당히 갖췄다.

‘드라마는 작가’라면 ‘영화는 감독’이다. 태생적 체질이고 변할 수 없는 생태계의 진리다. 전도연은 누릴 대로 누려본 ‘월드 스타’니 안방극장으로 연착륙하고, 영화는 이제 주변의 조언을 경청하면서 천천히 걸어도 된다. 고수는 소속사 ‘회장님’인 이병헌을 비롯해 김윤석 박해일 박희순 등 쟁쟁한 연기파들과 경연하는 새 영화 ‘남한산성’이 관건이자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

일단 ‘도가니’와 ‘수상한 그녀’를 쓰고 연출한 황동혁 감독이란 점은 긍정적이다. 멀티캐스팅이 가능했던 배경일 것이다. ‘잘생겼다’는 건 아무래도 장점이다. 하지만 ‘고비드’나 ‘요정’이란 극도의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압도적인 외모는 연기력과는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때론 독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대중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실망감도 배가되기 때문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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