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미디어파인=김나윤의 가시권-바깥]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는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주는 연탄재, 그 자체의 힘을 긍정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따뜻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누군가를 마음 놓고 동정해도 좋다는 정당성을 주진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교촌치킨 아르바이트생(이하 알바생)의 ‘감동 일화’가 역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작은 한 커뮤니티에 올린 교촌치킨 알바생의 후기 글이었다. 글 작성자인 알바생이 주문 전화를 받았고, 전화 너머의 모자(母子)의 딱한 사정을 짐작했다. 그리고 무료로 치킨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사비로 치킨을 결제해서 배달해 주었다는 것이다. 배달 후 아이의 어머니는 다시 치킨집으로 전화해, 울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알바생은 따뜻한 마음을 느꼈고, 예상치 못한 선행을 한 자기 자신에 대한 뿌듯함을 느낀다고 전하며 글을 작성했다. 이 일화는 치킨 배달원의 ‘감동 일화’로 소비되며 여러 인터넷 공간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알바생이 이 일화를 인증하겠다고 커뮤니티에 업로드한 영상이 모자의 사는 곳과 얼굴까지 적나라하게 노출했던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선행이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그가 교촌치킨 사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정규직 채용을 약속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알려지며, 논란은 가속화되었다.

인터넷상에서는 그가 일명 ‘빅 픽쳐’를 바탕으로, (선행 후의 표창과 혜택까지 생각하며) 선행하고 게시글을 올린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물론 어디까지가 그의 의도였는지를 논하는 것은 그저 짐작일 뿐이다. 사실 그가 선행으로 어떤 이득을 얻었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가 수화기 너머 모자를 왜 선행의 대상으로 판단했는가, 그리고 그들의 동의 없이 성급하게 인터넷 공간에 그들을 게시할 수 있었던 기제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영상의 내용과 그 의도에 공분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감동 일화로 소비되었던 그가 처음에 쓴 글 자체도 다분히 문제적이다. 그가 모자의 처지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부터 살펴보자. 그는 여느 때와 같은 주문 전화를 받았으나, ‘어눌한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고, 뒤이어 ‘엄마가 조금 아파서 그렇다’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치킨 하나만 가져다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가 처음에 쓴 글을 살펴보면 그는 “그때 든 생각이 주소를 보니(반지하 방에 살고 계셨음) 어려운 형편에 아들에게 치킨 한 마리 사주고 싶은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에 제 마음도 울컥해졌습니다.”라고 인식의 과정을 밝힌다. 그는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의 어투와 그들의 주소로 상대의 처지를 판단했다. 그리고 자의적으로 수혜의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말투가 어눌한 것이, 반 지하방에 산다는 것이 ‘돈이 없다’, ‘수혜의 대상’이라는 것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이 작동한다. 계속 살펴보자면, 더 나아가 모자의 의사는 묻지 않고, 이들에게 ‘이벤트’라고 속이고 선행을 한다. 물론 그의 후기에서는 치킨을 받고 모자가 좋아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과연 수혜의 대상이라고 모자를 판단하는 기제와 그들에게 의도를 속이고 선행을 하는 행위 그 자체를 마냥 ‘따뜻한’ 선행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수혜자가 그의 선행에 감동했다고 해서(그의 글에 의하면) 그 판단 과정 자체가 문제없는 것이 되진 않는다.

이때, 문제는 그 어디에서도 모자의 직접적인 발화는 들어볼 수 없다는 것이다. 모자가 좋아했다는 것도, 어떤 말투로 주문 전화를 했다는 것도 모두 알바생의 언어를 통해 발화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일화 속 모자는 철저한 타자이다. ‘어눌한 말투’와 ‘반지하 방’이라는 이유로 알바생에게도 타자화되어 ‘가난한 처지’로, 수혜의 대상으로 타자화되었고, 심지어는 알바생의 선행을 알리기 위해 그들은 커뮤니티에 전시되었다. 많은 이들에게 공분을 샀던 동영상의 문제는 이 타자화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알바생의 동영상 게시를 단순한 인터넷 공간에서 만연한 개인정보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모자는 현실에선 알바생에게 타자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화가 인터넷 공간에 게시되면서 많은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타자화되었다. 그들의 개인정보가 드러난 동영상의 문제는 그 타자화의 정점이다. 선행의 주체자-수혜자라는 맥락 속에서 철저히 다중으로 모자는 타자화되었고, 어디서도 그들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을 순 없다. 그들은 이 논란과 담론 속, 그저 ‘가난한 처지’의 ‘따뜻한 마음’을 가진 모자일 뿐이다.

이는 알바생 한 사람의 문제적 행동이라고 치부할 순 없다.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알바생의 사고방식과 다를 것이 없다. 기부처의 광고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린아이, 신체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카메라에 담아내며 약자의 모습을 재현한다. 이 재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연민, 동정을 느끼고 그들에게 자신의 돈을 기부하기에 이른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선행을 통해 약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려는 기부처의 의도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끔 약자를 잡아내는 카메라의 방식은 끔찍하리만치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교촌치킨 알바생이 모자를 타자화하고 그들에게 선행을 행하는 기제와 미디어가 어떻게 약자를 재현하고, 우리가 약자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분명히 같은 맥락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누구에게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라고. 또, “결과적으로 모자가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냐”고. “그 의도가 선했기 때문에, 또 수혜자가 좋아했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는 일이고, 이렇게 복잡하게 따진다면 누가 기부를 하겠느냐”고 말이다. 일견 이러한 의견을 수용한다. 그래서 일련의 논란을 보며 안도현의 시를 먼저 떠올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약자를 재현하는 방식 속에서 많은 선행을 이끌어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의 서사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 조심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약자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어떤 기제로 판단하고 있는지, 그에 앞서 미디어는 약자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 혹시 우리가 약자를 어떤 프레임 속에 가두며, 수혜의 대상이라는 구조 속에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확장해보면 단지 이는 빈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빈부, 인종, 성별 등 우리 사회의 약자를 우리는 타자화해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사회 속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연탄재를, 아니 연탄 그 자체를 문제적으로 바라보며, 약자가 하나의 주체로서 판단되기를, 그러한 맥락 속에서 아름다운 선행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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