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현재 우리 극장가에서 압도적인 흥행세로 순위 1, 2위를 나눠 가진 영화는 ‘스파이더맨: 홈 커밍’(존 왓츠 감독)과 ‘박열’(이준익 감독)이다. ‘스파이더맨: 홈 커밍’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소니 픽쳐스와 마블 스튜디오가 합작한 제작비 약 2000억 원의 전형적인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고, ‘박열’은 40억 원의 ‘독립영화’다.

외형으로나 내용으로나 극명하게 정체성을 달리하는 두 영화의 로케이션은 대척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스파이더맨: 홈 커밍’과 ‘박열’은 이미 각각 500만과 200만 명의 스코어를 넘어섰다. 전자는 떼돈을 들인 만큼 벌어들이고 있고, 후자는 높은 가성비를 보여주고 있다.

‘스파이더맨: 홈 커밍’은 천편일률적인 상업영화의 기승전결에 충실하다. 정신세계가 미성숙한 피터의 성장기는 판에 박힌 플롯의 무협소설과 판박이다. 하지만 그냥 천편일률적인 공식대로만 흘러갔다면 스파이더맨보다 더 뛰어난 슈퍼히어로가 다수 등장하는 ‘어벤져스’ 1, 2편을 능가할 듯한 흥행력을 보일 순 없었을 것이다.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중에는 미국의 제국주의나 자본주의를 비판하거나, 또는 국지적으로 대기업의 횡포 등을 조롱하는 메타포나 알레고리가 종종 눈에 띈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 빌런 벌처로 변신하는 아드리안은 일거리를 따면 현장에서 고용인들과 스킨쉽을 하며 앞장서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친화형 ‘사장님’이었다.

그런데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토니(아이언맨)의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그 일을 빼앗았다. 정부는 중소기업과의 약속을 어기고 대기업의 손을 들어준 셈. 아드리안은 가정을 그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장. 게다가 그는 고용인들의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막중한 사명감까지 갖춘 인물이다.

아이언맨에게 앙심을 품는 게 당연지사. 영화는 겉으론 스승 아이언맨과 제자 스파이더맨과의 티격태격하는 갈등의 과정을 지나 소년 피터가 어떻게 인격을 완성하는가의 ‘판옵티콘 Vs 시놉티콘’의 구조를 보인다.

▲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틸 이미지

마치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갇혀있듯 피터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토니에게 감시당하는 판옵티콘이지만 결국 피터는 토니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아를 찾아 어벤져스 본부에 안착하라는 토니의 엄청난 제안을 거절한 채 자립의 길을 떠난다. 역으로 감시자를 감시하는 시놉티콘이다.

벌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요즘 상업영화의 추세는 악당을 무조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오로지 이기적인 캐릭터로 그리지 않는다. 특히 슈퍼 히어로 영화가 그렇다. 벌처는 영조와 사도 사이의 갈등 애증 한 등을 풀어주는 정조의 역할을 맡는다. 마블 스튜디오가 DC 코믹스를 매번 이기는 이유는 단순한 재미 안에 이런 철학을 담을 줄 아는 영특함에 있다.

‘박열’은 이준익이 그린 박열을 보기 위해 표를 끊었다 가네코를 발견하고 가는 영화다. 시 한 편만으로 박열을 짝사랑하고, 첫 만남에서 동거를 제안하며, 전 국민이 신성시하는 천황을 죽이겠다고 앞장선 가네코의 광기는 박열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박열과 가네코는 다수의 눈에 독립투사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저항했다기보다는 탐욕스러운 제국주의로부터 조선과 일본의 국민들을 해방시키려는 아나키즘에 충실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불령사에 가네코 외에 다른 일본인도 동참했기 때문이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고, 쌓은 추억은 미미했지만 그 어느 연인보다 사랑했고, 그 사랑을 당당한 결혼으로 승화시켰다. 박열은 자신들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럴 경우 자신의 시신은 조선으로 송환되지만 일본인인 가네코는 일본에 묻힌다. 즉, 육신이 헤어진다는 얘기.

그래서 그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판사에게 부탁해 옥중 결혼식을 올린다.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위대한 사랑인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걸작 중의 매스터피스 ‘인터스텔라’가 뉴턴의 만유인력과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그리고 양자역학까지 동원해 그 어려운 물리학을 관객의 수송수단으로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1000만 명 관객을 동원한 비결은 종착역이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 영화 <박열> 스틸 이미지

‘박열’이 개봉되자 박열이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고 저평가된 독립운동가를 이준익이 연출한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호기심과 선호도가 먼저 반응했다. 관람 후엔 아나키즘의 인본주의에 감격하고, 가네코란 일본의 양심 혹은 니힐리즘의 광기를 주체하지 못한 한 남자의 동반자를 자청해 무한한 믿음과 애정을 쏟아낸 여자와 이를 연기한 최희서란 여배우의 발견에 흥분했다.

그리곤 결국 천박한 유행가 가사에 값싼 인스턴트 단골메뉴로 등장할 만큼 이기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의 유희로 전락한 사랑의 본질에 대한 갈망과 향수가 박열과 가네코의 숭고한 사랑 앞에서 자동으로 발화함에 따라 격정의 파토스에 몸서리치는 여운으로 남음으로써 ‘박열’을 지인에게 추천하게 되는 것이다.

외피는 물론 구조조차 완전히 다른 두 영화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다. 인생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숙제로 던지기 때문이다. 결국 헤도니아와 에우다이모니아로 나뉘는 행복의 가치관에 대한 고찰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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