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일본의 폄훼와 보조출연자의 불평등대우 논란 등의 화제를 낳았던 영화 ‘군함도’(류승완 감독, CJ엔터테인먼트)의 실상은 일제의 만행에 대한 매우 사실적인 고발과 80여 명 보조출연자들의 주연과 다름없는 역할 입증으로 드러났다.

조선의 꽃다운 여자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가 성의 노리개로 삼는 것도 모자라 동물보다 못한 대우로 학대하다 학살한 증거가 여기저기서 드러났지만 이 영화는 그런 식의 자극으로 천박한 호기심을 부채질함으로써 흥행을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인공섬 하시마에서 벌어졌을 충분한 타당성에 근거한 적당한 픽션으로 장르를 혼합해 무간지옥도 한 점을 완성한다.

1945년 패색이 짙은 일본의 최후의 발악이 극에 달할 즈음. 경성 반도호텔의 악단장 강옥(황정민)은 어린 딸 소희(김수안)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 음반도 취입하면서 열심히 살지만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 그래서 평소 친분이 있는 종로경찰서 간부 스기야마(정만식)를 매수해 소희와 악단원들을 데리고 큰돈을 벌 기회가 있다는 나가사키 행 배를 탄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도착한 강옥은 스기야마가 써준 추천서가 아무 쓸모없게 되자 그에게 속았음을 느낀다. 일본인은 큰 배에 실어 온 수많은 조선인들을 추려내 다른 배에 태워 어디론가 보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전쟁에 대는 석탄을 채굴하는 인공섬 군함도.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함께 끌려온 사람 중에는 종로 깡패 칠성(소지섭)과 모진 풍파를 겪었음이 확연한 말년(이정현)도 있다. 마초맨 기질이 다분하고 자존심이 강한 칠성은 무리 내에서 리더로 군림하려하고, 이에 반항하는 말년과 갈등을 빚는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를 부리는 노무계장 종구와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총책임자인 시마자키 소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일본인들은 그들만의 영역 안에서 특혜를 누리며 귀족처럼 살고, 조선인들은 짐승만도 못한 처우 속에서 목숨을 담보로 채굴을 하며 풍전등화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그들에게도 정신적 지주가 있었으니 독립운동을 하다 숨어들어온 학철(이경영)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광복군 소속 OSS 요원 무영(송중기)은 상부로부터 학철을 구해오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노동자로 위장해 합류한 인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는 드디어 학철과 마주한다. 이 혼돈의 시대는 아무리 한 민족이라도 함부로 믿을 수 없는 상황. 조심스레 무영과 대화를 나누던 학철은 결정적인 단서로 그가 요원임을 확인하고 함께 탈출작전을 꾸민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종구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이에 참다못한 칠성이 노무계장 자리를 건 일대일 대결을 일본군에 제안해 허락을 받아낸 뒤 당당하게 종구를 물리친다. 이제 노동자들은 칠성과 그의 부하들이 관리하게 된다.

말년과 소희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유곽에 배치된다. 짐승만도 못한 소장과 간부들은 소희마저 화장을 시키고 기모노를 입혀 술자리에 노리개로 앉힌다. 그런데 소장이 LP판을 틀자 겁에 질려있던 소희가 갑자기 흥분해 앞으로 뛰어나가 그 노래를 따라한다. 말년은 소장에게 그 노래를 취입한 사람이 바로 자신과 아버지라는 소희의 말을 통역해준다.

소장은 강옥과 악단원들을 불러 자신들을 위한 공연을 열도록 배려하고, 강옥은 그렇게 번 돈으로 일본 관리자들을 매수함으로써 편의를 제공받는다. 그의 희망은 오직 하나, 소희와 함께 이 지옥섬을 하루빨리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무영의 정체와 계획을 알게 되고 자신도 끼워주는 조건 하에 돕기로 약속한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일본은 전세회복이 불가능해지자 군함도 주둔군에 본토 귀환과 함께 증거인멸을 명령한다. 이에 일본군은 모든 조선인을 한구석에 몰아 폭사시킬 음모를 꾸민다. 본부로부터 탈출지령을 받기 위해 한밤에 일본군 사무실에 잠입한 무영은 타전을 마친 뒤 엄청난 진실이 담긴 일본의 기밀문서를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이 영화는 마치 ‘덩케르크’처럼 강옥 칠성 말년 무영 소희 등의 챕터가 각각 별개의 시퀀스로 펼쳐지다 나중에 한꺼번에 만나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된다. 희극과 비극이 적당히 버무려진 역사고발 드라마인 듯하더니 어느덧 전쟁 속에 피는 꽃처럼 애틋한 멜로가 그 위에 턱하니 얹힌다. 그 후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로 변주되다 결국엔 전쟁액션으로 마무리된다. 장르와 메시지에 집중했던 류 감독의 전작들과 많이 다르다.

말년은 “동네 이장에 속아 위안부로 끌려갔다 조선인의 도움으로 탈출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포주였고 더욱 혹사당했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군함도에서 조선 노동자의 뼈와 피를 녹이고 영혼을 갉아먹는 사람은 정작 종구 같은 매국노 혹은 기회주의자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영화가 집중하는 곳은 전쟁범죄를 왜곡하고 가리려 한 일본이 아니라 그에 동조하거나 진실을 외면하는 미필적 고의의 매국행위를 저지른 ‘한국인’에 대한 고발이다. 일본의 잘못을 바라보는 시선을 단순히 조선침략이라는 데 고착할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주권을 짓밟고, 민족혼을 말살했으며, 그 과정에서 천인공노할 비인간적 만행을 자행한 데로 제대로 꿰뚫자는 비장한 웅변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가 점령지의 조력자 없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었을까? 공개되기도 전에 적반하장 격으로 영화의 품격을 훼손하고 의의를 탈색하려 발광을 하던 일본의 우익세력에게 점잖게 훈계하는 듯한 준엄함마저 느껴지는 반전은 관객들을 전율하게 만들 것이다. “허구한 날 밟혀 살다 보니 굽실거리는 게 몸에 뱄다”는 대사는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세대가 바뀔수록 통일의 당위성과 절실함이 퇴색해가고,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소명의식이 윤색돼가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난 정권 때 국정교과서 채택이란 시대착오적 폭거에조차 분기탱천하지 못한 게 바로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 영화 <군함도> 스틸 이미지

‘군함도’는 확고한 장르적 재미를 갖춘 ‘베를린’이나, 뻔한 맛인 줄 알지만 손이 가는 스낵처럼 알면서 즐기는 ‘베테랑’ 같은 상업적 기준으로 볼 땐 다소 생뚱맞을 수 있다.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이정현을 한 프레임 안에서 즐기는 호강을 기대했다면 오히려 낭패감을 느낄 수도 있다. 영화는 곳곳에 내부의 적과 ‘시빌 워’를 복선으로 깔고 있다. 그래서 어린 소년들이 좁은 갱도 안에서 희생당하는 신만큼이나 매 시퀀스와 설정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류 감독이 보조출연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원톱은 분명히 있다. 송중기도 소지섭도 아닌 김수안이다. 아동배우라고 하면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기 위한 소모품이거나, 주연배우의 보조장치에 불과하기 마련이지만 김수안은 시작부터 끝까지 황정민에 못지않은 아우라를 뽐낸다. 단, 말미의 전투신은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132분. 15살 이상. 26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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