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브이아이피> 제작보고회 현장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시나리오를 쓰고, ‘신세계’의 연출까지 해낸 박훈정이 메가폰을 잡은 ‘브이아이피’(워너브러더스코리아 배급)는 일단 캐스팅이 화려하다. 장동건 이종석 김명민 박희순 주연에 박성웅과 조우진, 그리고 ‘콘스탄틴’(2005)에서 타락천사 루시퍼 역을 열연했던 피터 스토메어가 조연이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이런 화려한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안성맞춤으로 배열해 각자의 감정의 균열과 충돌을 잘 살린 박 감독의 연출력이 단연 돋보인다. 영화계의 VIP 배우들을 끌어모아 최대한 활용한 박 감독이 바로 이 영화의 VIP다. 작품은 결코 쉽지 않은 스토리와 어둡고 진중한 무게의 소재를 다루지만 감독은 영악하게도 5개의 챕터로 나눠 관객이 극 속으로 빠져들게끔 마법을 부린다.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2013년 현재.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은 상사에게 비밀로 한 채 일정보다 하루 앞당겨 홍콩에 도착해 CIA 요원 폴을 만난다. 폴은 한 건물을 가리키며 9명을 제거한 뒤 ‘목표물’을 데리고 나와 자기네 차에 태워주면 일은 간단하게 끝난다고 설명한다.

2008년 북한 신의주. 2인자(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장성택의 최측근인 평안도 당서기 김모술의 아들 광일(이종석)은 똘마니들을 데리고 아무 여자나 강간하고 죽이더니 그것도 모자라 한 소녀의 일가족을 살해한다. 드러난 연쇄피해여성만 10여 명. 평북 보안성 소속 공작원 리대범(박희순)은 정의감에 불타 광일을 잡으려하지만 ‘윗선’의 압력에 의해 무산되고 좌천까지 된다.

2011년 서울. CIA와 국정원은 합작해 광일을 ‘기획 귀순’시키는 데 성공한다. 한국 측은 그가 가진 고급정보가, 미국 측은 그가 알고 있는 장성택의 중국은행 계좌의 비밀번호가 각각 필요했던 것. 하지만 광일은 보통 청년이 아니었다. 북측에서 두뇌 좋기로 소문난 아버지보다 더 뛰어날 뿐만 아니라 차분하고 잔인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서울에서 잔인한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사건 담당 팀장이었던 조 경감이 돌연 자살로 세상을 떠난다. 고인에 이어 사건을 떠맡은 채이도(김명민) 경감은 폭력경찰로 소문난 다혈질의 인물. 어렵지 않게 광일의 혐의점을 찾아내 검거하지만 그의 앞에 재혁이 나타난다. 그리고 재혁은 진범이라며 광일의 똘마니 하나를 내던지고 광일을 데려간다.

이렇게 국정원과 경찰의 미묘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재혁의 생존전략과 이도의 정의감이 치열한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1차전의 패자는 이도. 광일을 빼앗기고 자괴감에 빠진 채 홀로 사는 아파트에 돌아온 그를 대범이 기다린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광일이 자신을 잡아들이려 했던 대범을 놔둘 리 없었다. 광일은 대범과 그의 부하들을 모두 죽였는데 대범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뒤 복수를 위해 귀순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때가 됐다고 판단해 이도 앞에 나타난 것.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대범은 광일이 홍콩에 체류할 때도 범죄를 저질렀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시 자금이 부족했던 광일이 범행장면을 찍어 스너프필름 판매업체에 넘겼고, 그 증거가 아직 인터넷에 남아있다고 귀띔해준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CIA가 개입해 광일을 인수인계해가려고 나선다. 재혁과 이도 앞에서 유유히 CIA 요원의 도움으로 수갑을 푼 광일은 갑자기 돌변해 요원을 폭행한 후 그의 권총을 빼앗아 누군가를 향해 겨누는데.

박 감독은 정말 독한 작가이고 영특한 감독이다. ‘신세계’가 기존 조폭영화나 누아르에 기반을 두고 진화한 허무주의적 누아르라면 ‘브이아이피’는 정치와 외교로 사이즈를 키우고, 인간군상의 다양한 감정선 사이의 얽히고설킨 내면의 세계로 철학을 확장한 냉소적 누아르라고 할 수 있다.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직업도 환경도 목적도 성격도 각기 다른 4사람이지만 스토리를 좇다 보면 재혁과 광일, 이도와 대범은 서로 닮았다. 정의감에 불타는 이도와 대범은 정의구현에 눈이 멀어 부하들을 거칠게 다루지만 사실 그들에 대한 애정과 우정이 각별하다. 무식해서 용감한 게 아니라 ‘단무지’라 정이 차고 넘친다. 그들은 오로지 먹이사냥에 눈이 먼 늑대다. 그러나 외로워서 밤이면 달을 보고 울부짖는다.

러시아와 중화권 유학파에 유창한 영어실력을 구사하는 광일은 잠든 시간을 빼곤 책과 음악을 가까이하는 지성인이다. 그러나 그건 외피일 뿐, 내면은 잔인한 광기와 이기적인 살상욕구로 가득 차있다. ‘금수저’로 태어난 그는 매우 특별한 인물을 제외하곤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고 우대만 받아왔기에 비뚤어진 특권의식과 지배욕구로만 인격과 인성을 완성한 인물이다.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이는 겉으론 원리원칙과 자연보호를 외치지만 내부적으론 일부 지배세력의 사리사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철권정치가 횡행하는 북한에 대한 알레고리다. 진정한 독립과 자주의 정신으로 정의를 외치는 대범이 살 수 없는 사회, 권력이 민중의 인권과 자유를 유린하는 조직, 범죄가 통치란 명목으로 합법이 되거나 묻히는 구조에 대한 메타포다.

그렇다면 반듯한 정장에 지성이 넘치는 검정 뿔테안경을 착용하고 표준어만 구사하는 장동건은 대한민국의 표상일까? 어쩌면 그는 남측의 광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동기(박성웅)와 함께 바뀌는 국정원장마다 줄을 대 그 입맛에 맞춰 처신함으로써 승승장구해왔다. 그들은 때론 ‘윗선’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았다. 더구나 폴과의 공조는 외교적 문제가 다분함에도 한두 번 법을 넘어선 게 아니다. 기시감!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그래서 두 사람은 과학적인 증명도, 철학적인 해명도 없이 자신만의 신조(혹은 아집)에 입각해 도그마가 아닌 독단을 자행하는 공통점에선 교조주의다. 이에 반해 이도와 대범은 신적인 존재(최고 권력자)의 권위와 권력을 맹종하지 않는 존재론적 인식론의 자세를 견지한다. 그들이 믿는 건 통증이고, 따르는 건 팩트였다. 범인이 누구냐가 중요하지 않았고, 범죄여부가 중요할 따름이었다. 왜 저질렀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그냥 정의가 구현되는 장치와 구조만 맹신하면 됐다. 그게 자신에게 날선 부메랑이 돼 되돌아올지언정.

챕터가 바뀔 때마다 서서히 변화하는 장동건의 내면의 구체화 장면은 ‘친구’를 계기로 달라진 그의 연기력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될 듯하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그의 눈빛에선 니힐리즘과 염세주의가 동시에 펼쳐진다.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가장 놀라운 변화는 이종석이다. 지금껏 트렌디 드라마나 말랑말랑한 영화에서 봐왔던 이종석을 생각하면 오산이고, 선입견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이 첫인상부터 악마를 보게 만들었다면 이종석은 처키보다 더 소름 끼치는 반전의 악마를 그려냄으로써 관객을 전율하게 만들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으로 누아르 특유의 비장미를 담고 있지만 중간중간 상황에 따른 분위기로 웃기고, 통통 튀는 대사로 수시로 웃긴다. 시종일관 욕과 담배를 입에 달고 다니는 김명민의 거친 연기는 말끔한 복장과 용모의 장동건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이종석과의 대치에선 최고의 웃음과 분노를 동시에 선사한다. 당분간 이런 고퀄리티의 누아르가 나올 수 있을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의 웰메이드필름이 탄생했다. ‘대호’로 박 감독에게 실망한 관객들을 위한 일대 반전의 영화다. 잔인해서 미성년자 관람불가. 128분이 언제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 8월 2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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