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택시운전사’(장훈 감독, 쇼박스 배급)는 개봉 19일 만인 지난 20일 오전 누적 관객 수 1000만 명을 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중 이전까지 최고의 성적은 ‘화려한 휴가’(2007년)의 685만여 명이다.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전두환 정권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독일기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와 그를 광주로 데려다준 서울의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화에서 비롯됐다. 총제작비 150억 원은 택시 등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그려낸 소품 및 세트 등에 많이 투자됐다.

지난 11일 북미를 시작으로 해외에서도 개봉됐는데 미국의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는 신선도 지수를 93%라고 썼다. 송강호는 북미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호평 속의 흥행비결은 뭘까?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먼저 이 영화의 단점부터 지적하자면 만섭(송강호)이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은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광주를 탈출하는 시퀀스에서의 카 체이싱 신이다. 광주 시민을 사찰하는 임무를 띤 사복조장(최귀화)이 피터와 만섭의 존재를 확인한 뒤 부하들을 이끌고 관용차로 택시를 추격한다. 당연히 양쪽 차량의 성능으로 봤을 때 만섭이 잡히는 건 시간문제.

그때 광주의 택시운전기사들이 힘을 합쳐 관용차들을 공격한다. 이 시퀀스가 거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상황 자체는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 현실감을 방해하는 건 사실이다. 이전까지 각 인물들의 감정의 기복이나 교류 등에 충실한 스토리 전개로 관객들로 하여금 비극과 휴머니즘에 몰입하게끔 만들던 감독은 여기서 과욕을 참지 못하고 그동안 일관됐던 얼개를 깨뜨리는 오점을 남긴다.

의외로 유해진과 류준열의 활약이 그리 크지 못하고 빨리 퇴장하는 것도 아쉬움이다. 이런 진중한 영화에서 유해진의 코미디를 기대하는 건 무리이긴 하지만 그의 캐릭터는 매우 평면적이고, 활약은 관성적이다. 류준열 역시 “저는 대학가요제 나가려고 대학에 갔는데”라는 대사 하나를 빼면 임팩트가 그리 강하지 못하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그 대신 최귀화, 광주지역신문 최 기자 역의 박혁권, 비포장도로 검문소 중사 역의 엄태구가 있다. 유해진이 “택시기사는 손님을 태워야 하고 신문기자는 기사를 써야 한다”라고 화두를 던지자 최 기자는 기자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부장을 비롯해 신문사와 싸운다.

광주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서울 번호판을 떼고 광주 번호판을 붙인 만섭 일행이 비포장도로에서 검문을 받을 당시 중사가 트렁크를 열고 서울 번호판을 확인하지만 눈감아주고 부하들에게 통과시킬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비장하면서도 한없는 존경심을 드러내는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낸 엄태구의 한 커트는 정말 최고의 임팩트를 자랑한다.

당연히 크레취만과 송강호의 버디무비형 연기 콤비가 일등공신이다. 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도 할리우드의 베테랑 크레취만에 결코 뒤지지 않고 오히려 리드하는 송강호의 연기력은 극찬을 받아도 낯 뜨겁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는 평가가 줄을 잇는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도대체 애드리브인지 아니면 시나리오인지 모를 그의 특유의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는 방언 같은 대사와 어눌한 말투, 그리고 천박한 인간의 속성과 순진함을 오가는 캐릭터 표현력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영화의 또 다른 강점은 광주의 진실을 보다 더 널리 알리고 역사의 아픔을 공유하자는 단순한 프로파간다를 넘어선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메시지에 있다. 만섭은 이승만의 친일정권을 그대로 답습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데마고기로 자신의 우상화를 극대화했던 당시의 최면에 걸린 민심을 그대로 담은 전형적인 ‘꼰대’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목돈을 벌어온 뒤 그걸로 개인택시기사 면허를 따고 택시도 샀다. 당시 개인택시 면허가 ‘거래’됐다는 증언은 차고 넘친다. 그 역시 약간의 비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연히 그는 ‘본전’은 뽑는 건 물론이고 유일한 가족인 어린 딸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하지만 번번이 시위하는 대학생 때문에 운행에 제동이 걸린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공부하라고 기껏 대학에 보냈더니 데모나 한다”라고 혀를 차던 그는 피터와 함께 광주에 가서 무장한 군인이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하게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는 걸 보곤 변한다. 정권과 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합작한 최면에서 깨 비로소 인권과 자유를 정립하는 것이다.

그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다. 딸을 사랑하는 데에도 그 이기심이 개입한다. 물론 그가 광주의 비극을 해결할 그 어떤 능력을 보유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피터를 광주에 남겨둔 채 어린 딸을 돌보기 위해 서울로 향한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핸들을 확 돌려 다시 광주로 향한다. “손님을 두고 왔어”라는 외마디 독백과 함께. 이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영화의 흥행은 개봉을 전후한 광고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추동되는 힘으로 롱런의 추진력을 얻게 된다. 그 동력의 바탕은 개봉 직후 관람한 관객들의 입소문이다. ‘영화 좋더라’ ‘재밌더라’라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드디어 1000만 고지에 오르는 것이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택시운전사’의 흥행은 전형적인 그 입소문의 효능을 누린 결과다. 그렇다면 입소문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아무래도 영화의 플롯과 스토리 안에 담긴 묵직한 인간다움의 철학일 것이다. 그건 하이데거가 인간을 ‘터있음’(현존재)이라고 사유한 구체적 성찰에 기초한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수시로 고뇌하고 고민하면서 사유한다. ‘나는 어디서, 무슨 이유로 왔으며, 산다는 건, 행복하게 산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의 존재와 생사의 인식과 의식에 대한 고찰이다. 만섭은 이전까진 오로지 돈을 위해 살았다. 사는 이유에 대한 인식과 관념의 노력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돈을 벌어야만 생명을 유지하고 자식을 돌봐야만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광주에서 깨달은 건 사람이라면 부상 등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줘야 한다는 휴머니즘이었다. 기사는 손님을 목적지까지 태워줘야 하고, 기자는 진실을 취재해서 보도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소명의식이 사라진 채 자신의 안위와 입신영달에만 눈이 먼 상실의 시대에서 감금된 사명감과 양심을 탈옥시키자는 적극적 의지가 부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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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건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통해 드러난 국정농단사건을 통해 깨달은 국민으로서의 주권의식과 고취된 민중해방의식이 팽배해진 사회적 분위기와 맞닿아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은 노무현 대통령 재임 때 탈권위주의와 격식 파괴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지만 이은 두 정권을 통해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한 고통을 겪으며 피로감이 급증했던 듯하다.

그런 와중에 1980년의 광주는 참으로 안성맞춤의 소재였다. 국민의 눈 귀 입 등을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전두환의 독재 및 내란행위 등에 대해 모두가 숨죽이고 눈치를 살필 때 용감하게 분연히 일어난 광주시민들은 바로 지난해의 광화문의 촛불민심이었던 것이다.

만약 언론이 국정농단사태를 폭로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도 박근혜가 청와대를 지키고 있었다면 과연 이 영화가 제대로 스크린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아무런 방해공작 없이 롱런할 수 있었을까? 블랙리스트 상단의 송강호가 주연이고 광주가 소재인데.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이 영화가 1000만 관객을 가뿐히 넘을 수 있었던 비결은 재미가 아니라 감동이란 건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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