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명리학은 통계학인가? [정동근 칼럼]

정동근 승원역학연구원 원장l승인2017.08.23l수정2017.08.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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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정동근의 명리학 산책] 사주명리는 어떤 학문인가. 학문인가 아니면 통계인가. 의견도 분분하고 각기 다른 정의도 많다. 명리학을 과학으로 규정하긴 무리다 보니 통계학 정도로 포지셔닝(positioning) 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명리학은 결코 통계학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 명리학은 한 사람의 운명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거치는 시공간을 ‘음양오행’이라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천간(天干)의 신장 과 지지(地支)의 십이지신(十二支神) 신장인즉 하늘과 땅의 신장이 하나의 육십갑자(六十甲子) 부호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리학자 개개인이 나름의 논리구조를 가지고 부호를 해석하고 추리하는 과정에서 통계적 도움을 받는 것일 뿐, 학문 자체를 통계학으로 뭉뚱그리긴 다소 무리다. 명리학은 나름의 논리와 이론적 바탕 위에 특정 시공간에 대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간 집적된 방대한 표본을 분석해 비슷한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역학(易學)은 명리학의 근간이다. 역학이란 글자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아보자. 가장 먼저 역(易)은 도마뱀 머리와 꼬리 모양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도마뱀은 몸 색깔을 자유롭게 변색하는 동물로 알려졌다. 역자의 윗 글자(日)는 머리를 형상화했고 아랫 글자(勿)는 네 다리를 상징한다. 그래서 바꿀 ‘역(易)’ 이라고 하며 이는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역학은 명리학의 근간…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것’을 의미

또 다른 이론은 일(日)과 월(月)이 만나 만들어진 형성문자라는 것이다. 일(日)은 양(陽)이고 월(月)은 음(陰)이다. 상하음양(上下陰陽) 합(合)이 역(易)이라는 의미다.

과학적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엔트로피(entropy)가 늘어나면서 점차 복잡해져 간다. 그러나 봄(春, spring)→여름(夏,summer)→가을(秋,autumn)→겨울(,冬winter)→봄(春, spring) 음(陰), 양(陽)의 질서와 우주의 운행은 오행(五行)의 순환무절(循環無絶)과 같이 오차없이 유구하게 계속된다.

오행은 천문학으론 다섯 개의 태양계에서는 가까운 별 인 오성(五星)을 의미한다. 이들 일월성신(日月星辰) 및 일월성수(日月星宿)와 풍운우로상설(風雲雨露霜雪)의 운행이 역(易)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날씨나 일기를 관측하는 법칙에서 역(易)자가 생겼다는 설인데 논리적으로 다소 억측이 있는 듯하다.

주역(周易)은 주나라 시대 역을 의미한다. 주나라는 원래 은나라 서쪽 부족국가다. 기원전 11세기 문왕과 무왕이 혁명을 일으켜 은나라를 뒤엎고 천하를 잡는다. 문왕과 아들이 괘사와 효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상고시대 삼황오제 중 으뜸인 복희씨가 만든 8괘를 문왕은 64괘로 만들어 차례를 다시 정하고 괘사를 붙인 후 아들인 주공이 각 괘의 384효에 설명을 붙인 효사를 합해 ‘주역경문’이라 불렀다. 주역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 역학은 춘추전국시대, 한나라, 송나라, 명·청나라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송나라 때 자평 선생이 ‘연해자평’을 통해 사주학을 완성시켰다. 사주학은 수천년간 명맥을 이어오면서 운명에 대한 적중률을 높여나갔다. 그래서 통계학으로 보는 시각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기상청에서 관측하는 슈퍼컴퓨터보다 아직도 별자리로 보는 고대기상관측이 더 앞서 있는 건 사실인 것이다.

상고시대부터 수 천 년 이어져온 학문

재미난 것은 사주명리학이 엉터리, 주술적인 내용이었다면 학문으로 자리 잡지 못했을 뿐 더러 명맥 유지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명리학자들과 이들에 사주를 보기 위해 몰려 드는 고객을 보면 학문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역학자는 과연 신의 제자일까, 아니면 사람의 욕심에서 나온 신을 팔아먹는 장사꾼일까. 학자라는 지위아래 신의 세계의 신호로 인간의 인생을 학문으로 예언하는 사람은 아닐까. 학문으로 예언을 했다면 결과물인 인간의 구원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이 현실에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귀신 장난 속에서 구원을 학문이라 할 수 있을까. 구원을 기도로 풀어가는 사람들인 무속인 이들은 스스로 신의 제자라 호칭하며 광고를 하는 시대 속에서 종교계와 ‘기도’라는 이름으로 공존 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신이 선택한 제자였을까.

학자와 무속계와 종교계는 하나의 목적으로 생긴 지위다. 인간의 구원.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하느냐는 그 해석에 따라 수 천, 수 만 가지 이유와 뜻이 갈린다. 단순 학자라면 역사를 거꾸로 기원전까지 거슬러 갈 듯 하다. 그 시대에도 기도는 존재 했을 것이며 신의 종류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문명이 발달 하면서 논리가 생겼으며 기록으로 학문이 남았다. 그 학문은 과연 정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었을까. 그 시대에 구원을 갈구하는 기도는 과연 신이 구원했을까. ‘아무도 모른다’가 답이라고 하고 싶다.

살아보지 않은 세상 답을 내리려 수만의 학자가 연구를 하면서 ‘이랬을 것이다’로 정의를 내린 논문도 많았다. 과연 사견이 없는 정답이 역사 속에 있었을까. 사진도 사견이 있고 당사자의 욕심도 있다. 그걸 제3자는 평가를 한다. 숨은 그림자 같은 얼굴을 다양성 변화, 이것을 진화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역학의 숨은 학문, 숨은 정답, 숨은 깊은 뜻, 이것을 찾는 학자는 세상에 나오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는 학자는 엄청나게 많다. 단지 우리가 몰랐을 뿐이다. 그런 사람도 신의 세계를 어떤 사고력으로 판단하며 연구를 거듭하여 정답을 내릴 수 있었을까.
 
역시나 글을 보면 ‘이랬을 것이다’로 답을 내렸을 뿐이다. 학자의 사고방식은 중립적이 되어야 하며 기도는 절실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고 정의를 내리면 안 된다. 아는 것이 다가 아니란 것이다. 99%의 정확성도 1%에서 잘못 판단한다면 그건 잘못된 관점의 사고력이다.

죽음을 앞 둔자 앞에서 단호하게 ‘내가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소!’라고 단정 지을 학자는 아무도 없다. “살려 볼려고 최선의 노력은 해보겠소. ” 라는 언어만 구사할 뿐이다. 현시대의 관점은 내가 정확하다의 관점으로 광고하고 스스로 피알을 해서 구원이 절실한 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 문제다.

과연 얼마나 남의 인생을 함부로 구원을 했을까. 있는 사람보다 없다고 믿는 고객층들이 다수이다. 학자의 정의를 내릴 수가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모든 언어의 구사력이다. 현시대의 역학은 언어통계학으로 바꾸었다. 언어로서 운명을 다지고 언어를 글로 정리하여 학문으로 남겨 기록물을 증좌로 우린 공부하며 연구할 뿐 그것을 100%라고 정의를 내려선 안 된다. 언어 속에 귀신이 등장하고 희로애락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귀신은 반드시 존재한다. 너무 많아서가 문제인 것뿐이다. 학문의 끝은 연구이고 지속적인 변화된 것을 기록한 일기장에 불과할 뿐 그것을 통계학이라 평가 받는 현실 속에서 내가 찾는 기록물도 후대에는 학문이라 일컬으며 통계를 내리며 인생을 점칠 것이다. 易에는 기록물이 숫자가 들어가 있고 한자가 들어가 있다. 한자와 숫자가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반복되어 시간을 만들어 내고 역사를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없는 문명 속에서는 어떻게 점을 볼 수 있었고 예언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5000년 역사 그전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을 모르면 통계학에서의 시작된 꼭짓점 무엇을 가지고 통계를 내렸을까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오행 속에서 우리가 존재 할뿐이다. 자연은 오행이고 자연은 오행을 낳았다. 우린 자연이 남긴 오행을 사람의 언어학에서 학문으로 가지고 연구하며 공부하고 사람의 운명을 예언한다. 우리의 역학의 뿌리, 그 통계는 다시 반복을 거듭할 것이다.

오행의 암장된 깊은 뜻과 변화·진화된 맥 찾아가며 연구해야

미래의 5000년은 어떨까. 과거 5000년 역사가 있었다면 미래 5000년 역사도 통계를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자연의 변화도 알아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구원을 엿 볼 수가 있다. 명리학은 마야문명 때부터 시작된 절대적 통계학문이라고 필자는 생각 한다.

중국에서  명리학자들은 명리학을 술수학(術數學), 줄여서 술학이라 한다. 술수란 수를 다루는 기술이란 의미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의 수(數)는 영어의 수(number)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한자의 수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가능성이다 보니 또 통계학으로 오해 받는 부분이다. 명리학에 의해 계산되어지는 사주 유형은 103만8600개에 달한다. 따라서 통계학적으로 보기에는 숫자가 너무 방대하고 통계에 의미를 더더욱 연구해서 사회적 흐름을 빨리 읽어야 하지만 중국에서는 현재 명리학을 하지 않고 주역으로만 통계를 뽑는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제는 주역의 시대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주역은 과거 중국 5000년 역사를 한번 주저 앉혔다고. 주역은 명리학에서 나왔고 명리학은 자연에서 나왔다. 자연은 지금 우리가 밟고 다니고 보고 다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을 망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은 우리고 사주는 본인의 자아인 것이다. 자아 속에 자연이 있고 우주가 있다. 이것이 명리학이고 술이기도 하다.

▲ 정동근 승원역학연구원 원장
정동근 승원역학연구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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