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용훈의 썰전] 갈수록 지식의 잣대는 매우 간단명료하다. 인기 있는 자는 지식이 있는 것이고 인기 없는 사람은 날조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기는 선을 만들고 비인기는 악을 만든다는 괴변을 베이컨은 알았을까? 공공성과 패착이라는 말도 여기에 해당된다. 다수의 의견이라고 확인한 자 없고 소수의 패착이라고 단정 지은 자 없다. 적어도 국민 속에는 없다. 높으신 분들의 생각엔 공공근로와 소수적 특권이 눈꼴시럽다는 말로 생선 배를 가르지만 실은 국민의 어느 쪽에서도 ‘노동시장 유연화, 재벌기업 분권화’라는 말에 해법이라고 동의하는 자는 없다. 다만 국민을 담보로 뽑힌 자는 담보성으로 밀어붙이고, 그에 살아남은 자는 역시 대세라는 말로 뽑힌 자의 말에 중언부언 한다.

부의 창출은 어느 한 쪽에서 쪼아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당나라 시인 백낙청의 시에는 비익이라는 새가 나온다. 한쪽의 날개만 가졌기에 혼자서는 절대 날지 못한다. 타고 날 때부터 한쪽 날개만 있어 둘이 함께 나란히 날개 짓을 하지 않으면 절대 날 수 없다. 우리 경제시장도 마찬가지이다. 한쪽의 날개가 금싸래기로 치장한 큰 날개라 해도 한쪽 날개로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나머지 한쪽의 날개를 가진 새의 날개가 순수하고 자연적이라고 해도 혼자 날지 못한다. 둘 다 금싸래기이든 아니든 어느 정도 비슷한 조건과 크기가 되어야 한다. 물론 그 조건에는 약간의 기형적 형태를 띤 날개가 있다. 그렇다고 둘 다 똑같을 수가 없다.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고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억지로라도 맞추어 똑같이 만들려고 하지만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것이다. 날아야 먹고, 먹고 살아야 건강해질 수 있다. 날개의 작은 불균형은 그 다음의 일이다. 도도한 학이라고 하는 자들은 아직 제대로 날아보지도 못했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우리는 엄연히 수출 탑 천만 불을 날개 짓으로 뛰어 넘었다. 그게 어디 기업 혼자서 하는 일인가? 아니다. 노동이라는 한쪽 날개가 포함된다. 그 날개가 금싸래기가 아니고 상처투성인 날개라도 함께 했기에 날았다. 여기에 반문하는 자들은 날개가 같아야지 어찌 불균형이냐고 이유를 단다. 하지만 이것은 금으로 휘장 한 새를 태생적 성격과 그 노력을 비방하는 또 다른 이기주의이자 시대주의이다. 귀족노조, 강성노조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된다. 어찌 한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 한명은 땅만 보고 살았다고 하고 한명은 하늘만 보고 살았다고 하는가? 그럴 순 없다. 혹여나 그랬다면 땅을 본 모가지는 좁지만 좀 편했을 것이고 하늘을 본 모가지는 넓었지만 아팠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재벌과 강성노조는 게똔지똔이다. 서로 태생이 다를 뿐 이기주의는 마찬가지이다. 협력적 관계는 팩트이다. 사실로 본다면 우리의 경제 활성화와 시장질서 자유화는 초라한 날개에 더 많은 혜택을 준다는 것 자체가 비민주주의 비형평성이다. 분명 모가지가 아프도록 노력해서 얻은 결과고 어둡지만 모기지가 덜 아픈 것을 선택한 것 역시 한쪽 날개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두 새는 서로의 운명적 날개를 선택하였고 함께 날았다. 지금도 날고 앞으로도 난다. 이것을 한쪽 날개가 금치장이 심하다고 꺾어대며 깃털을 뽑아내는 데만 집착한다면 더 높이 더 멀리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건 유명무실하다.

좌우 위 아래로 매와 독수리들이 득실한 경제밀림에서 살아남는 건 깃털싸움이 아니라 항해 싸움이고 협력적 전략모델이다. 더는 상대방의 깃털을 두고 왈가불가하는 발목잡기식 님비현상은 버려야 할 때이다. 이는 기형적 날개를 가진 우리의 생태적 경제를 더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된다.

▲ 김용훈 국민정치경제포럼 대표

[김용훈 대표]
정치·경제 컨설턴트
시사칼럼니스트
시인(2011년 등단)
현) 국민정치경제포럼 대표

저서 : 새벽한시간, 지하철안에서 생각을 만나다
      남자시, 그렇게 보낸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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