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이슈&피플] 전주가 끝나고 메인 멜로디의 연주가 계속됐지만 보컬은 들리지 않고 대신 살짝 젖은 흐느낌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러자 객석에선 가수가 놓친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예감할 수 없었던 이별이었기에/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눈물만 흐르네요’ 다음 가사 ‘믿을 수가 없었던 이별이었기에/ 무슨 이유로 떠나야했나요’가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이에 용기를 얻은 가수는 뒤늦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 왜 나를 떠나야했는지/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었나요/ 내 모습이 정말 싫어요/ 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나요/ 내 이별에 끝은 어디인가요’를 이어서 불렀다. 객석에선 박수갈채와 환호가 쏟아졌다. 17년 만에 컴백해 온갖 비난과 질타와 마타도어 등을 한 몸에 뒤집어쓰면서도 그토록 갈망했던 제2의 노래인생을 이어가고 있는 양수경이었다.

9월 10일 오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삼성홀. 은퇴를 번복하고 컴백한 이후 지난 8일부터 첫 단독콘서트를 연 양수경은 3일 내내 우황청심환을 먹고 무대 위에 올랐다. 공연 마지막 날인 당일 확실히 그녀는 체력이 좀 떨어진 듯했지만 노래 안에 담은 감성만큼은 절정이었다. 음정이 약간 불안하다 싶으면 노련한 테크닉으로 탈출하고, 고음에서의 발성이 과하다 싶으면 이내 감정조절로 매조졌다.

삼성홀은 650석. 3일 내내 1900여 석의 자리를 가득 메울 정도로 공연은 성황이었다. 한류열풍으로 이대입구 일대는 물론 이대 내부조차 외국인 여행객의 쇼핑과 관광의 메카가 된 지 오래. 그래서 이대 캠퍼스는 젊은 관광객으로 붐비기 일쑤였지만 3일 동안만큼은 달랐다. 특히 일요일인 10일은 아시아 지역 관광객과 40~60대 양수경 콘서트 관람객이 교묘한 비율을 이루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물론 1900명 모두 순수한 자발적 구매자들은 아니었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지지하고 아껴준 열성팬들이 주축이 돼 전국의 팬들을 동원해줬다. 아예 2박3일 일정으로 ‘가출’한 중장년들도 꽤 있었다. 결정적으로 공연의 흥행에 방점을 찍어준 이들은 양수경의 최측근 지인들. 특히 미국과 일본에서 입지를 굳힌 선후배들이 큰 도움을 줬다.

양수경에겐 ‘발라드의 여왕’이란 호칭이 자주 붙지만 사실 그녀를 발라드라는 한정된 장르에 묶기엔 무리가 있다. 냉정하게 평가해 그녀의 창법과 목소리 톤과 주로 추구하는 음악 안에는 한국적 가요의 화법과 정서가 물씬 배어있다. 저음에서 감정을 덜컥 내려놓는 듯한 창법과 프레이즈의 전환기나 마무리에서 살짝 꺾거나 비트는 바이브레이션(비브라토)은 한의 정서를 담은 가요적 창법이고, ‘바라볼 수 없는 그대’의 반음 플랫시키는 테크닉은 블루스 창법이다.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지지해온 마니아들(40대)은 트로트 성향이 아니다. 이날 게스트로 등장한 바비킴에 열광한 게 그 증거다. 객석에선 50~60대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들이 양수경의 ‘사랑은 차가운 유혹’에 맞춰 객석에서 일어나 온몸을 흔들었다.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가 아님에도.

그건 양수경이 비교적 편향되지 않은 지지층을 갖춘 가수거나 최소한 음악적으로 편식하지 않는다는 명명백백한 증거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표한 노래들만 봐도 입증은 매우 쉽다. 1집의 ‘바라볼 수 없는 그대’는 리듬앤드블루스, ‘그대는’은 테크노와 가요의 결합이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는 록을 가장한 트로트고, ‘외면’은 블루스와 재즈를 아시아적인 발라드로 변형했으며, ‘못다한 고백’은 기존에 변진섭과 최성수로 대표되던 한국적 발라드의 방향을 틀어 클래시컬한 발라드를 지향했다. ‘당신은 어디 있나요’는 심수봉에 발라드 감성을 얹은 가요(트로트)고, ‘잊을래’도 고고 리듬에 얹은 트로트다. 가장 특이한 곡 ‘사랑은 차가운 유혹’은 살사와 펑키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이지만 가요 성향이 짙다.

이렇듯 다양한 장르를 혼식하는 그녀라 그럴까? 이날 객석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40~50대 부모와 함께 온 10~20대는 그렇다 치고,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큰형’ 격이었던 한 정치인과 전통 보수정당 소속이었던 전 국회의원이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은 이채로웠다. 한쪽에선 경상도 사투리가 다른 쪽에선 전라도 사투리가 들렸다. 환호하는 목소리 속에는 남녀가 혼재했고, 한쪽에선 트렌스젠더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가 특정한 키워드에 있는 게 아니라 노래가 담은 정서라는 증거로 보였다.

그녀가 객석을 향해 고백했듯 ‘초대’한 값은 적지 않은 11만 원. 요즘 같은 불경기에 휴일 반나절을 즐기고자 1인당 그만한 돈을 지불하는 게 만만치 않겠지만 공연을 관람하고 나오는 청중들의 얼굴에선 불만의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100명에 가까운 팬들이 현장 CD판매대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그녀의 신보 ‘애련’의 자필사인과 기념사진 촬영을 기다릴 정도였다.

아마 시련극복이라는, 그녀가 지난 1년 반 동안 보여준 모습이 초대의 이유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고, 그게 또 각자의 가슴속에 동병상련이라는 피그말리온 효과로 관통했기 때문이 아닐까? 양수경은 “화장 지워져, 울지 마”라는 팬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울었다.

가수도 연예인이니 당연히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한다. 하지만 최소한 이 공연에서의 양수경만큼은 연기솜씨를 발휘하진 않았다. 하와이에서 전화 걸어 집세가 밀렸다며 호소하는 3남매(그중에 둘은 죽은 여동생의 자식) 생각을 하며, 슈퍼스타에서 하루아침에 빚쟁이 신세가 된 자신을 되돌아보며 흘린 눈물이란 진정성 하나만큼은 확실해보였다.

하이라이트로 들려준 노래는 조관우의 ‘늪’, 김범수의 ‘약속’을 작곡한 하광훈이 선사한 ‘애련’. 지난해 발표한 ‘사랑, 바보’가 기존 가요의 벽을 넘어서 음악 고유의 전통을 지킨 고급화된 가요를 지향했다면 ‘애련’은 가사 멜로디 편곡 모두 전형적인 가요와 발라드의 조화에 중점을 둔 아날로그 정서에 충실하다는 점에선 다분히 대중적이다.

컨츄리꼬꼬와 코요태의 동명이곡과는 전혀 다르게 침잠된 비련의 감정이 지하수로 흐르는 느낌을 준다. 특히 ‘그래도 난 사랑하다 죽고 싶다’라는 마지막 가사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안에서의 사랑의 가치관을 심각하게 사유하게끔 만든다.

공교롭게도 이날 공연장 안에는 대중의 질타 혹은 ‘눈초리’를 받는 연예인이 3명 정도 있었다. 연예인이라면 으레 유명해질수록 비난 혹은 질시의 대상이 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저변엔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질투와 욕구불만이 야기한 폭력성이 깔려있기 마련. 그래서 연예인의 몸값과 사회적 위상이 높아질수록 올바른 몸가짐이 요구되는 게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사회다.

미움과 의혹의 감시망 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양수경으로선 이제 1차 관문을 넘어선 느낌일 것이다. 30대가 도덕의 기초 위에 서는 이립이고, 40대가 미혹하지 않는 불혹이라면, 그녀는 충분히 실패를 경험한 뒤 하늘의 뜻을 알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삶을 추구하는 지천명의 50대다. 욕을 먹는 건 어쨌든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오랜 터널을 지나 밝은 무대 위에 설 수 있었던 건 하늘의 뜻이라는 걸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참)이슬만 먹고살며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목에서 피가 나오도록 취중고성방가했던 괴로웠던 시절 그녀가 가장 그리웠던 건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이었고, 이제 소중한 걸 잃은 만큼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걸 얻었으니 지천명의 의미를 되새길 일이다. 슬플 ‘애’ 자는 이제 노래 속에서만 존재해야 하고 그건 그녀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선배가수 임희숙이 ‘슬픔이여 (이젠) 안녕’이라고 노래했듯.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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