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드라마 <조작> 화면 캡처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대중이 보도로 검찰에 출두하는 연예인을 본다면 십중팔구 피의자 신분이기 마련이지만 18일 오전 서울 중앙지방검찰청에 출석한 문성근은 피해자였다. 국가정보원 개혁위원회가 ‘이명박 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내 정부 비판세력 퇴출’ 건을 조사한 결과 블랙리스트 명단에 그를 비롯해 김여진 윤도현 김제동 등 82명이 올라있었다.

문성근은 지난 12일 막을 내린 SBS 드라마 ‘조작’에 출연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수는 이날 이 보도를 접하곤 ‘드라마를 보는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문성근은 ‘조작’에서 메이저 신문사 대한일보의 구태원 상무 역을 맡아 보이지 않는 거대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온갖 악행을 일삼고, 수많은 기사를 조작하며 체제전복을 꾀하는 열연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흡사 영화 ‘내부자들’을 연상케 했다. 당연히 구태원은 조국일보의 이강희(백윤식) 논설위원이 오버랩됐다. 강희는 굴지의 재벌회장을 ‘형님’으로 모시며 친구인 집권여당 대통령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을 주무르려는 데 선봉에 선 인물이다. 젊었을 땐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독재정권에 저항해 열혈기자로 활약했지만 결국 자본과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인물이다. 태원 역시 비슷한 캐릭터.

▲ 영화 <내부자들> 스틸 이미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국정농단사태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탄핵된 초유의 대통령이 발생한 뒤 박근혜 정권은 물론 그전의 이명박 정권까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여론을 조작하려 했다는 정황 혹은 혐의가 속속 불거진 현 사태는 희한하게도 이 두 작품과 닮았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고, 뭐가 옳고 그른 것이며, 연예인의 정치적 몸가짐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일까?

히틀러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자신을 신격화하고, 나치를 찬양하게끔 만든 사실은 유명하다. 그의 지시를 받은 여자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라는 영화로 1930년대 대중을 선동함으로써 히틀러와 나치를 찬양하게끔 만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영화는 그런 악랄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영화 역사상 걸작 안에 포함된다.

철학적 고뇌가 깊은 사람일수록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을 불신하는 경향이 짙은 편이다. 과거엔 데마고기(허위선전)가 횡행했고, 아직도 잔재해있으며 프로파간다(선전)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자라면 으레 피지배자에게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합리화)시키기 위해 크레덴다를 일삼기 마련인 게 그 배경이다.

하지만 그게 이성적 방법일 땐 국민들이 어느 정도 동조하지만 헛된 매니페스토(공약)를 남발하고, 야비한 로그롤링(투표담합, 야합)으로 정권을 잡은 권력집단이 오직 포크배럴(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눈이 멀어 블랙리스트라는 스케이프 고트(정부가 국민의 눈을 돌려 반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만든 적, 혹은 그 적을 만드는 정책)를 만들고, 그들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흔드는 행위는 결코 크레덴다가 될 수 없다.

▲ 사진=KBS 뉴스 화면 캡처

이미 우리에게는 김정은과 그를 지지하는 포크배럴의 집단이라는 주적이 있다. 김정은은 우리 집권세력과 국민 모두에게 공통의 적이자 굳이 조작할 필요가 없는 스케이프 고트다. 그런데 분명 우리 국적의, 우리 국민을 즐겁게 해주는 유명 연예인을 ‘빨갱이’로 만드는 스케이프 고트로 헛된 힘을 낭비함은 물론 국민의 혈세를 쏟아붓는 것은 법을 떠나 분명한 배신이고 이적행위에 가깝다.

더구나 디지털 환경을 악용해 유치하게도 문성근과 김여진의 합성한 나체사진을 유포하는 등의 인포데믹스(부정확한 정보를 전염병처럼 퍼뜨려 정치 안보 경제 등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는 것)를 통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행위는 분명히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할 중대한 범죄행위이자 심각한 사생활 침해 및 명예훼손이다.

이런 현상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땐 발에 치이듯 남발된 대표적인 조작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유명 연예인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이다. TV 보급률이 그리 높지 못하던 박정희 정권 때 가수들의 노래는 신문기사보다 더 영향력과 파급력이 컸었다. 이를 겁낸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매우 지엽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연예인까지 모두 싸잡아 ‘활동금지’로 입에 재갈을 물렸다.

▲ SBS 드라마 <조작> 화면 캡처

컬러TV시절로 넘어올 때까지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은 그 범위를 넓혀 심지어 자신의 외모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탤런트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개도 웃을’ 만행을 버젓이 저질렀다. 하지만 1990년대 접어들어 이 모든 게 개선되고, 정상을 찾아가는 듯했으나 이명박과 박근혜를 잇는 정권에서 부활했다는 어이없는 사실이 확인됐다.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국민들이 개탄할 수밖에 없는 개악적 회귀다.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진보적 연예인은 눈엣가시였겠지만 이-박에겐 아마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연예인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만큼 그들이 대중에게 끼칠 엄청난 나비효과를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일 터. 유명 연예인의 대사 하나가 유행을 바꾸고, 어깨에 메는 가방 하나가 기업을 살릴 정도니 이해는 된다. 그러나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디지털 독재라는 것 역시 명명백백하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엔 연예인들은 ‘알아서 기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정권에 고분고분하거나 아예 아부했었다. 정치인들의 프로파간다와 데마고기에 동원되는 걸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앞장섰으며 그걸 자랑삼거나 최소한 자신의 입지를 위해 활용했던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뭐, 그땐 시대가 그랬으니’라고 인간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용인한다면 당시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위해 싸운 투사들만 억울할 노릇이다.

▲ SBS 드라마 <조작> 화면 캡처

연예인도 국민이다. 자신들의 소신과 의지에 따라 보수든 진보든 정치적 성향을 띠고, 좋아하는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확립되지 못하고, 억압과 폭력이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되던 시절 생존을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면 이젠 할 말은 하는 게 대중의 지지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연예인의 사명이라면 사명이다.

연예인의 가장 큰 직업적 책임은 국민의 행복이다. 노래로 삶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건, 극적인 스토리의 영화나 드라마로 아픈 감성에 카타르시스의 눈물을 적시건, 바보 소재 코미디로 천박한 웃음을 자아내건 국민의 서민적 코드에 만족을 주면 된다. 그렇다면 촌철살인의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대국민봉사다.

국민들이 하고 싶었지만 정치인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해있고, 전달할 통로가 없는데 유명 연예인이 언론을 통해서든 거리에 나가서든 한 마디 말과 자그마한 몸짓 하나라도 보여준다면 그 파급효과는 광화문광장의 1인 피켓시위와는 차원을 논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날 것이다. 정치인들은 소속 정당의 정책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경쟁 정당끼리도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란 게 있어서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박박 긁어주기엔 한계가 있다. 그걸 연예스타가 대신해준다면 국민들의 카타르시스는 훨씬 배가될 것이다.

▲ SBS 드라마 <조작> 화면 캡처

물론 본업인 연기나 노래는 안 하고 만날 정치인 비난이나 정책 토론만 하고 다니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다. 그러려면 아예 기존 정당에 입당하거나 아니면 자신만의 정치철학을 앞세운 새 정당을 구성해 정치일선에서 싸울 일이다.

민주주의는 야당이 필수다. 만약 집권세력의 정책에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야당이 민주주의의 걸림돌이라면 애초에 민주주의가 수립될 때 대선에서 패배한 정당은 해산하는 걸로 했어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다는 건 건강한 정치를 위해선 야당이 꼭 필요하다는 증거다.

그건 집권세력에 대한 감시의 목적이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유명 연예인들이 집권세력의 정치활동과 정책에 목소리를 높였던 건 그만큼 그들이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이자, 야당이 제구실을 못했다는 증명이다. 더불어 정권이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행복추구 등에 매진해도 부족할 시간에 자신들의 입맛에 안 맞는 언행을 하는 연예인 리스트를 꾸리고 그걸 관리하려 했다는 정황은 분명한 혈세낭비고, 국력소모였다.

▲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스틸 이미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42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소아과 의사 코르작은 독일군 장교에게 은혜를 베푼 인연으로 유대인 학살현장에 끌려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집단몰살하려던 고아들을 구하려다 그게 안 되자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고, 아이들과 함께 열차에 올라 나중에 ‘천사들의 행진’이란 슬프지만 아름다운 역사를 남겼다. 마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정치란 그렇게 국민을 보살피고 국민과 모든 것을 함께하는 행위이고, 집권자란 그런 행동에 앞장서라고 국민이 뽑은 대표자다. 자기한테 표를 안 던졌다고 스케이프 고트로 만드는 치졸하고 편향되며 아전인수의 포크배럴만 챙기는 정치인이나 지도자가 있다면 여론과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 게 진정한 민주주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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