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북한은 연신 무력시위를 벌이고, 미국은 북한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초강경대응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일본은 미국을 무조건 지지하는 가운데 노골적으로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 등에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열강들의 각자 다른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도 안에서 복잡한 추상화가 됐던 대한제국 혹은 그 이전의 이씨조선시대를 보는 듯하다.

영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은 1636년의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김훈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정말 절묘하게도 현 정치상황과 맞물려있다. 지난 5월 개봉돼 83만여 명의 관객동원이라는 아쉬움을 남긴 ‘대립군’의 부족한 철학을 나름대로 꽤 차지게 보완한 작품으로서 흥행여부를 떠나 역사에 남을 만한 문제작임에는 틀림없다.

때는 ‘대립군’의 제 한 목숨 부지하겠다는 비겁한 아버지 선조로부터 분조의 권섭국사 직위를 받은 광해가 임진왜란을 잘 평정하고 왕위에 올라 안정과 개혁에 몰두했으나 서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폐위되고 인조(박해일)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 지난 1636년.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여진족을 통일한 후 만주족을 평정하고 중국본토의 명나라의 숨을 목까지 압박한 후금이 대청제국을 선언한 청 태종(칸) 때다. 이미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를 동생으로 삼은 칸은 여전히 명을 지원하는 조선을 아예 속주로 삼기 위해 용 장군에게 10만 대군을 보내 침략전쟁을 벌인다.

이에 인조 등 조정은 한양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고립된 채 지원군을 부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 피란길에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은 송파강 나루터의 늙은 어부를 만난다. 그는 인조의 피신을 도운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런 충성을 했음에도 쌀 한 톨 받지 못했다며 만약 청군이 도움을 청할 경우 식량을 얻을 수 있으면 흔쾌히 그러겠다는 말을 듣고 단칼에 베어버린다.

남한산성 안에 곧 칸이 직접 출전한다는 소문이 흘러들어온다. 명나라와 대치 중인 중차대한 상황에서 그가 친히 출정에 나선다는 건 기필코 조선을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의미다. 산성 안의 ‘임시정부’ 안에선 연일 열띤 회의가 벌어지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상헌의 척화파와 대세에 따라 명을 외면하고 청과 손잡아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의 화친파로 당파가 갈라진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명길은 특사를 자청해 용 장군의 삼전도 군영을 방문한다. 청의 통역사는 조선의 노비 출신으로 후금에 투항해 역관이 된 정명수(조우진). 용 장군은 그를 통해 인조에게 항복하면 전쟁을 끝낼 것이며 그 조건으로 세자를 볼모로 청에 보낼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 요구조건을 놓고 조정 내에선 찬반의 양론이 강력하게 맞붙는다.

드디어 칸이 직접 나선 것을 안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고, 상헌은 대장장이 출신이지만 지혜와 무력을 동시에 갖춘 서날쇠(고수)에게 유일한 희망인 근왕병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격서를 전달할 임무를 맡긴다.

소설과는 또 다른 픽션이 가미됐지만 과정과 결과는 우리 국민이 잘 아는 내용이다. 영화가 집중하는 곳은 명분을 주장하는 상헌과 실리를 외치는 명길의 대립,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인조, 또 제 살길만 찾는 영의정(송영창) 등 서인들이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명길과 상헌의 철학적 논쟁이 뼈대를 형성하다보니 이른바 팝콘무비적 요소는 거의 찾기 힘들다. 150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만큼 세트는 웅장하고 정교하며, 미술과 소품도 볼 만하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손댄 음악도 웅장하다. 하지만 스케일이 큰 액션은 재미를 제공한다기보다는 무능한 정치를 꾸짖고 아픈 역사를 조명하는 데 중점을 두고자 노력했기에 눈이 화려할 틈도 없이 가슴이 크게 아리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적 구조는 있지만 결과를 알기에 그리 긴장되진 않는다. 크나큰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뻔한 스토리가 희한하게도 139분이란 러닝타임을 전혀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드는 힘이 엄청나다. 그건 이병헌과 김윤석이란 베테랑의 때론 불꽃이 튀고, 때론 공간을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연기대결이 숨을 멎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양극단의 대척점에 선 명길과 상헌은 정치적 앙숙관계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목을 베어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친다. 이쯤 되면 그들은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이 나야 할 텐데 서로를 쳐다보는 눈길이 마치 애틋한 정이 지나쳐 구슬만 한 눈물을 쏟을 듯 애처롭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그건 이념이 다를 뿐 그들이 가진 철학의 근간은 한결같기 때문이다.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상헌은 ‘무조건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명분과 자존감과 역사를 저버리고 사는 건 죽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명길은 ‘일단 목숨을 건진 다음에 후일을 도모해야 잘못된 것도 바로잡을 수 있지, 지금 개죽음을 당한다면 역사고 명분이고 되살릴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진한 동병상련의 동지애가 그 겨울의 모진 눈보라만큼 아름답고 푸짐한 꽃을 피운다.

감독은 철저하게 두 사람을 이분법적 이념의 도화지 위에 그리고, 인조를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위치에 배치한다. 그래서 상헌의 원샷은 스크린의 왼쪽에, 명길은 오른쪽에, 인조는 딱 중간에 자리 잡는다. 상헌은 혁신과 개혁을 지향하는 이상주의자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건 무책임이니 자존감만큼은 지키자는 이념이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순간 산 게 아니라 죽은 것이라며 그럴 바에야 죽더라도 나라의 품격은 지키자는 것이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명길은 현실주의다. ‘지금 모든 사람이 죽는다면 백성은 누가 지키냐’는 것이다. ‘질 줄 아는 전쟁으로 왕과 관리들이 모두 희생당한다면 청의 군사들이 조선의 백성들을 유린할 게 뻔한데 왕과 조정이 자존심을 내려놓음으로써 백성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하지 않냐’는 논리다.

방향은 다르지만 출발점은 똑같다. 민생이다. 지도자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특권자가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고 그걸 위해선 자신을 마땅히 희생해야 한다는 공자의 대동사회,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 김정희의 실사구시, 경국제민의 경제학 등을 아우른다. 이에 반해 영의정 병조판서 등 간신들은 철저하게 아전인수의 기회주의에 집착한다. 심지어 인조로부터 채찰사란 군지휘권을 받아 전투에 나섰다 전 병사를 몰살시킨 영의정은 그 잘못을 그동안 혁혁한 전과를 올린 수어사 이시백(박희순)에게 뒤집어씌우는 파렴치한 면모를 보인다.

영화는 삶과 길의 두 가지 주제를 화두로 던진다. ‘임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제 백성 살 길 열어주는 이’라며 ‘삶의 길은 살아야만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답을 내는 명길에 맞서 상헌은 ‘살아서 죽느니 죽어서 사는 게 낫다’며 그 길은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 낡은 것 모두 사라진 뒤 임금까지도 우리가 세운 길’라고 주창한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인조는 무능한 지도자다. 군사들이 추위에 나가떨어지자 민가의 지붕을 떼어내 그들에게 주는 것도 모자라 군마가 기아에 허덕이자 또 그걸로 군마를 먹이더니 이내 군마를 잡아 군인과 백성에게 나눠준다. 그 말고기를 먹는 한 백성이 내뱉는 말이 걸작이다. “아니 한양에서 끝장을 낼 일이지 왜 여기서 지랄이야?”

백성은 인조가 다스리든, 칸이 다스리든 어차피 독재에 시달리긴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등 따뜻하고 배부르며 자식들이 좋은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지, 누가 정권을 잡든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과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주는 지도자를 원할 따름이다. 국정교과서 채택이라는 초유의 역사왜곡 사태를 막은 이 시대에 이 영화는 금지옥엽이자 금과옥조 같은 소중한 역사교과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깊은 철학을 담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전쟁터에서 우연히 발견된 어린 소녀가 상헌에게 넘겨진다. 나루라는 이름의 소녀는 바로 상헌이 죽인 어부의 손녀. 이 만남은 사람의 인연이란 불교철학이다. 인연 연기(緣起, 인연에 의한 사물의 발생) 인과는 불교 교리의 가장 근본적인 사고방식이다.

▲ 영화 <남한산성> 촬영 현장

有緣千里來相會 無緣對面不相逢(유연천리래상회 무연대면불상봉), ‘인연이 있으면 천 리 밖이라도 와서 만나고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맞대고도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상헌과 나루는 사실 원수 관계지만 악연이란 뜻이 아니다.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죄인인 상헌은 어부가 청을 도울 소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였다.

그 앞에 어부의 유일한 혈육이 나타난 건 그에게 깨달음을 주는 신의 현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묘호란 때 아내와 딸을 잃은 천민 날쇠에게 큰절을 올리고 나루를 넘긴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백성들이 직접 뽑은 왕이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개혁을 꿈꾸며 홀로 외로운 ‘길’을 간다. 나루터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장소다. 15살 이상. 10월 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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