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 영화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추석 연휴가 드물게 10일씩 주어짐으로써 극장가의 흥행다툼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꽤 진한 울림을 주는 한국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가볍게 제치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킹스맨: 골든 서클’이 압도적인 선두를 질주 중이지만 언론시사회 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 CJ엔터테인먼트 배급)과 ‘범죄도시’(강윤성 감독,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배급)가 흥행전쟁에 가세할 예정이라 관객들의 ‘골라 보는 재미’는 크게 증폭될 것이다.

영화를 즐기는 방식은 각자 다양할 터지만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찾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즐거운 시간이 되는 동시에 지적인 허영심도 남에게 들키지 않고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에서 ‘남한산성’은 ‘택시운전사’ 이상의 커다란 장점을 갖춘 ‘웰메이드 필름’으로서 벌써부터 호평을 얻고 있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소재는 우리 국민이 매우 잘 아는 1636년의 병자호란이다. 중국의 새 주인이 된 대청제국의 태종은 숨이 꺼져가는 명을 아직도 섬기는 조선을 아예 속주로 삼기 위해 직접 출정해 남한산성에 숨어든 인조의 턱밑까지 압박하는 중이다. 조정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척화파와 대세를 따라야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의 화친파로 나뉜다.

이 영화는 거의 상헌과 명길의 철학적 논쟁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려하고 화려한 대사의 명불허전이 넘실댄다. 상헌은 ‘무거운 죽음으로 가벼운 삶을 초월해야 한다’고, 명길은 ‘죽음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목에서 피를 토한다. 남한산성의 전력은 참전이 가능한 민간인까지 포함해도 1만5000명이 고작이다. 이에 반해 삼전도에 모인 청의 군대는 10여만 명의 위용에 장거리용 화포까지 갖췄다. 군사 수로 보나 화력으로 보나 상대가 안 된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이 뻔한 대치정국에서 명길은 일단 청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당장은 치욕스럽더라도 목숨을 보존해야 종묘사직도 지키는 것이고, 그렇게 훗날을 도모해야 오늘의 수치를 내일의 명예회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논리다.

이에 반해 상헌은 ‘목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가 진정한 인간 실존의 가치’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에서는 자존심과 명분이 금과옥조다. 마치 인식론의 영국 경험론과 독일 관념론(혹은 이성론)의 대립과 같은 형국이다.

애지(愛知)의 학문인 철학은 그 대상과 개념이 가장 불분명하고도 방대한 학문이다. 그래서 한 독재자는 걸핏하면 자신의 정치철학을 운운하며 독재를 정당화하려는 망발을 수시로 남발했다. 정치에도 철학이 있을 수 있지만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국가와 정의를 동격으로 규정하고, 통치자는 반드시 선(善)의 이데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제멋대로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무고한 국민들을 군홧발로 짓밟음으로써 유지한 정권이, 그 주동자가 철학을 운운하는 건 개도 하품할 자가당착이고 아전인수다. ‘남한산성’은 인조를 최소한 그 정도 극악무도한 통치권자로 그리진 않지만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역사는 반영하고자 노력한다. 그 역시 쿠데타로 그 자리에 옹립된 허수아비가 아니었던가?

대신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표적인 캐릭터로 설정된 상헌과 명길의 역사 인간 사회 등의 근본적 탐구방식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만큼은 담대하게, 또 간절하게 담아낸다. 시대마다 다르긴 하지만 철학의 시작과 전개는 인간의 실존이 매우 큰 의식과 인식의 과제였다. ‘우리는 어디에서, 왜 왔으며,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답게 사는 것일까? 왜 죽어야 하나? 사후세계는 어떨까, 있기나 한 걸까?’ 등이다.

이 물음에서 상헌과 명길의 답은 매우 확고하고 명쾌하다. 쉽게 얘기해 상헌은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하고 죽을 인생이니 짧더라도 굵게 살아 역사에 명예롭게 기록되자’는 이상주의를, 명길은 ‘딱 한 번뿐인 삶이니 기왕이면 오래 살고, 내일을 기약해 더 윤택하고 풍요롭게 여생을 살도록 노력하자’라는 실리주의를 주창한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이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두 사람에게도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국가론’의 근간을 잇는 ‘국가는 민중의 생명과 안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인에게 던지는 교훈이자, 삶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동물적 생존본능에만 의존해 숨을 유지하려는 일부 이기주의들에 던지는 아주 쉬운 인생철학이다.

‘범죄도시’는 두 주인공의 현실주의(보수주의 혹은 편의주의)와 허무주의를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린 모순과 이기주의를 비판한다. 영화는 마초맨 이미지의 정점에 있는 마동석을 강력계 형사 마석도로, 아이돌그룹 출신으로 멜로의 주인공을 도맡아 해온 윤계상을 무시무시한 중국 조폭 출신 살인마 장첸으로 각각 캐스팅한 것부터 일단 반어법적 논리를 펼친다.

▲ 영화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가리봉동 조선족 밀집지역 유흥가는 3개파의 폭력조직이 구역을 나눠 관리하고 있고, 석도는 그 조직의 두목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친소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치안을 지키려 노력 중이다. 당연히 그는 폭력조직의 편리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챙기면서 공무원직을 지키기 위한 실적도 적당하게 올리고 있다.

그런데 장첸이 두 명의 독종 같은 심복을 데리고 와 3개 조직을 차례로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연일 살인사건을 저질러 기존의 질서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장첸이 잔인한 폭력일 일삼고 토막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이유는 물론 돈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돈에 매우 집착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부하들은 더욱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냥 폭력과 살인 자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하다.

석도가 동네 주민들의 안녕을 위한답시고 하는 행동은 폭력과 야합이다. 조폭들의 범죄를 적당하게 눈감아줌으로써 그들의 폭력을 자제시키면서 실적을 올리는 한편 뒤로 그들로부터 뇌물을 상납 받거나 뜯어낸다. 또 용의자를 잡아오면 CCTV를 가리고 폭행과 고문을 일삼는다. 마치 규칙과 정의와 법을 원칙대로 지켜나간다면 형사 일을 할 수 없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적당한 불법도 합당하다는 보수주의의 논리다.

▲ 영화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장첸에게선 행동과 삶의 목적이 불분명하다. 돈을 벌기 위해 악행을 일삼지만 그 돈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거나 가족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겠다는 등의 목적의식이 없다. 돈이 생기면 값비싼 요리를 먹는 것도, 명품 옷을 사 입는 것도, 고급 외제차를 사는 것도 아니다. 그의 삶은 니힐리즘으로 가득 찬 듯하다.

석도 주변의 공무원들은 더욱더 모순된 인물로 설정돼있다. 동기인 석도를 제치고 강력반장 자리에 앉았고, 더 높은 곳의 승진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전일만(최귀화)은 무능하면서 자신의 입신영달만 추구하는 나쁜 공무원의 전형이다. 그는 국민의 안녕과 법질서의 구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승진을 위해 부하들을 닦달한다. 동생이나 전우와 다름없는 부하들의 밥값도 낼 줄 모르는 자린고비다.

▲ 영화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막내 형사는 조폭이 무서워 정보과 내근직으로 도망갔다가 어느새 석도의 폭력에 젖어들고, 다시 강력계로 되돌아온 후 ‘제2의 마석도’가 돼간다. 잔인하고 악랄한 강력범죄자들을 잡기 위해서 담당형사들이 어쩔 수 없이 그들보다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모순이다. 간간이 볼 수 있는 조폭보다 더 조폭 같은 경찰과 검찰이란 아이러니를 반어법으로 그려내는 문법이다.

추석연휴 온 가족이 볼 만한 영화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거나 불편한 두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광이라면, 재미와 상념을 동시에 즐기고자 하는 수준의 관객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두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들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죽어야) 하느냐’의 철학적 사고를 질문으로 던진다. ‘킹스맨’ 시리즈나 ‘어벤져스’ 시리즈와 비교하면 아직도 테크네의 갈 길은 멀었지만 철학적 발전은 일취월장한 한국영화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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