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2월 개봉된 ‘컨택트’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로 확실하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드니 빌뇌브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유일한 라이벌은 바로 자신이라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언어철학과 더불어 인생철학의 정수였다. ‘킹스맨’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외친다면 ‘컨택트’는 벤자민 리 워프의 ‘언어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는 명언을 화두로 삼는다.

천체물리학자인 이안과 언어학자인 루이스를 맞붙여 ‘모든 문명의 기초는 과학’ Vs ‘모든 문명의 기초는 언어’라는 갈등을 빚게 만들고 당연히 승리는 루이스의 몫이 된다. 4대문명은 문자를 기초로 인류에 문화를 비롯한 모든 발전을 부여했지만 각 민족은 각자 다른 언어 때문에 오해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 양자역학 등의 물리학을 접목한 놀란의 ‘인터스텔라’에 비견될 정도로 빌뇌브가 찬사를 받은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시대를 앞선 거장 리들리 스콧의 ‘저주받은 걸작 SF’로 영화사에 남은 ‘블레이드 러너’(1993년 개봉)의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소니픽쳐스 배급)를 들고 왔다. 그의 팬들은 물론 SF마니아들이 흥분해 날뛸 만한 ‘사건’이다. 과연 ‘공각기동대’를 비롯한 숱한 걸작 SF에 영향을 끼친 이 ‘정체성의 니힐리즘의 교과서’의 속편의 세계관과 철학은 얼마나 확장됐을까?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블레이드 러너’(전편). 2019년 LA. 생태계가 파괴돼 지구에 자원이 현저하게 부족해지자 인류는 다른 행성의 식민지화를 위해 타이렐사가 만든 인류에 거의 근접한 복제인간 리플리컨트를 활용해왔다. 리플리컨트의 수명은 4년. 그런데 임무수행 중이던 강력한 리플리컨트 로이 일당이 불법으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지구로 침투한다. 이들을 잡기 위해 은퇴한 리플리컨트 사냥꾼인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LA경찰로 소환된다.

타이렐 박사를 죽인 로이와 맞닥뜨린 데커드는 그러나 워낙 강력한 로이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낙담한 로이는 오히려 데커드를 구하고 자신이 죽는다. 타이렐 박사의 조카의 기억을 복제해 만든 리플리컨트 레이첼과 사랑에 빠진 데커드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잠적한다. 

‘블레이드 러너 2049’. 그 후 생태계는 더욱 악화됐고 리플리컨트는 보다 더 인간에 가까워졌지만 연이은 폭력반란 이후 ‘생산’이 금지되고 타이렐사는 파산한다. 2020년 대정전 사건으로 숱한 기록이 사라지는 과정을 거친 2049년, 합성농법으로 기아를 해결하며 실권자로 부상한 월레스(자레드 레토)는 타이렐사를 인수해 순종적인 리플리컨트 신모델 제작에 나선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LA경찰국 소속 K(라이언 고슬링)는 국장 조시(로빈 라이트)의 강력한 신임을 얻고 있는 블레이드 러너다. 아직 살아남은 유효기간이 없는 구모델 넥서스8을 찾아 ‘퇴역’(사살)시키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가 찾아간 곳은 외딴 농가. 전투용으로 칼란다에 파견된 바 있는 모튼을 발견한다.

모튼은 "넌 기적을 본 적이 없으니 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K에게 죽는다. 밖에 나온 K가 본 것은 죽은 고목 하나. 그런데 그 나무의 밑동엔 6-10-21이란 의문의 글귀가 적혀있다. 그리고 그 아래 땅속에서 상자가 감지된다.

그 속엔 죽은 지 30년 된 한 여인의 유골이 들어있다. 정밀검사를 하니 그녀는 리플리컨트지만 임신을 했고, 출산 중 죽은 것이었다. 모튼은 그녀를 각별히 보살펴준 은인이었다. K는 혼란에 빠진다. 이를 눈치 챈 조시는 K에게 “네 임무는 질서유지야. 이 일은 못 본 거야”라고 입막음을 한다.

그런데 월레스의 비서 러브(실비아 혹스)가 자료실에 침투해 유골을 훔쳐간다. 월레스는 그 유골이 출산한 아이만 찾는다면 자신이 창조주가 돼 세계를 정복할 수 있으리란 확신에 K의 뒤를 쫓는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K는 조시의 명령을 어기고 최초의 자연출산 리플리컨트의 비밀을 풀기 위해 나선다. 그가 먼저 만난 사람은 기억복제 및 주입의 최고 권위자로 타이렐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애나 박사. 그녀로부터 엄청난 숨겨진 비밀을 발견한 그는 그 비밀의 열쇠를 쥔 데커드를 찾아가는데.

참으로 엄청난 영화가 탄생했다. ‘블레이드 러너’가 공개되던 당시 평론가들은 혹평을 했다가 2~3차례 더 관람한 뒤에야 비로소 극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웬만한 관객은 그 곱절은 더 봐야 영화 곳곳에 숨은 감독의 의도를 눈치챌 듯하다. 그만큼 영화는 하고자 하는 말이 많다.

1. 정체성의 확장. 전편은 도대체 인간은 뭐고, 어떤 게 인간다운 것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큰 주제였다. 데커드는 칼날(Blade)위를 달리는 사람(Runner)이다. 전편 개봉 후 데커드가 과연 인간인가, 리플리컨트인가 논란이 많았는데 이번에 그 정체성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조시는 K에게 “이 세상은 큰 벽을 경계로 2개의 세계로 나뉘어졌다”는 세계관을 펼친다. 그 벽은 바로 인류와 복제인간의 경계선인 칼날이 아니던가?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결국 K는 데커드가 왜 잠적했는지, 그가 품고 숨긴 비밀은 무엇인지 찾기 위해 그 칼날위에서의 달리기를 멈추고 아예 그것을 뛰어넘어 오프월드를 누비며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전편에서 로이는 자신을 창조한 타이렐 박사를 죽였지만 자신을 죽이려던 데커드를 오히려 살려주고 자신이 죽는다. 창조주에 대한 배신과 파괴자에 대한 희생이라니! 교묘한 종교적 역설이다. 이에 비교해 빌뇌브는 K를 통해 스콧의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철학을 절묘하게 잇는다. 그건 후설의 선험철학적 현상학에 기초한 기초존재론적 파악과 존재적인 초월이다.

2. 존재론을 묻는 존재의 기원, 그리고 감정과 본능이다. 전편에서 로이 등은 법으로 금지돼있는 감정이란 걸 갖게 된다. 그리고 4년뿐인 생명을 늘리기 위한 생존의 본능에 의해 행성을 탈출해 지구로 숨어든다. 데커드 곁에 항상 붙어 다니는 감시자 개프는 데커드에게 유니콘의 꿈을 심어준 장본인일 수도 있다. K는 나중에 혁명조직을 만난 뒤 모튼의 죽음의 의미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하이데거의 ‘나의 실존함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개시성(열어-밝혀지는)의 존재와 세계의 개시성으로 인한 존재자 전체의 개방성’이다. 바로 ‘세계-내(內)-존재’로서의 현존재다. 그건 이 작품의 엔딩 장면에서 비장하지만 매우 아름답게 그려진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현실과 환상, 탄생과 복제, 창조주와 피조물, 유식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철이 들고나면 삶 내내 사색과 의문에 잠기게 만드는 주제다. 신화와 종교는 인류를 신이 창조했다고 하지만 존재학은 좀 달리 봤다. 과연 리플리컨트가 인간의 복제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랑을 통해 아이를 ‘생산’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 영화의 가장 큰 의문점은 전체주의에 대한 민중봉기이자 독재자의 압제에 맞선 개혁이며 자아성찰 혹은 정체성의 주체적 완성이다.

3. 언어철학. ‘컨택트’ 자체가 언어의 미학이었기에 그에 비교할 순 없지만 여기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전편은 미래의 미국 혹은 세계가 자본을 앞세운 일본과 인구의 힘을 자랑하는 중국에 의해 점령될 것을 예고했다. LA 거리는 온통 일본어와 중국어가 넘실댔고, 데커드는 일본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K가 밥 먹을 땐 단무지가 나온다). 이번엔 다국적 언어다. 일본어와 중국어는 여전히 주류를 이루지만 모튼의 농장엔 러시아어가, 심지어 데커드의 은신처인 예전의 카지노 건물엔 ‘행운’이란 한글이 버젓이 내걸려 있다. 언어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4. 삶과 죽음이란 인생철학. 홀로 외롭게 사는 K의 유일한 친구는 첨단과학이 만든 홀로그램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다. 단지 오디오회사에서 만든 프로그램에 불과한 이 ‘가짜’를 K는 진짜 연인 겸 아내로 여겨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아무나 돈만 내면 탄생시킬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이 꺼지는 걸 극도로 거부한다.

월레스는 데커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새로 만든 레이첼을 선물한다. 그러나 데커드는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며 그녀를 거부하고, 러브는 망설임도 없이 레이첼을 총으로 쏴 죽인다. 전편이 생존의 본능을 강조했다면 이번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묻는다. 어떻게 사는 게 진짜 사는 것인지, 사람으로서 사는 게 어떤 건지 러닝 타임 내내 메타포로 심어놓았다.

하이데거는 존재사유를 통해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죽는다는 건 살아왔고 살아있기 때문에 맞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맞는다는 건 단순히 생의 마감에서 찾지 말고 남들보다 앞서간다는 의미에서 새롭게 되돌아보자는 은유를 물씬 풍긴다.

▲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라이브 프레스 컨퍼런스 현장

5. 그리고 화려한 비주얼. ‘시카리오’와 ‘컨택트’를 본 관객이라면 빌뇌브의 비주얼에 대한 작가적 창의력과 예술적 상상력을 인정할 것이다. 비장하고 암울한 누아르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디스토피아적 미래관이 창조한 비주얼은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주의! 빌뇌브의 작가주의 정신과 철학적 사유는 향후 내놓을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무한대로 부풀려도 될 만큼 놀랍다. 하지만 그와 지적인 두뇌게임을 펼치는 게 만만치 않기에 스콧의 전편을 예습하고 가는 게 이해에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 163분(더 길어도 됐을 텐데). 15살 이상. 10월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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