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희생부활자>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애지중지 키워온 불쌍한 아들이 갑자기 살인을 저질렀다. 이 사실을 안 엄마는 진실을 밝혀야 할까, 아들을 위해 이를 아는 자신 외의 유일한 증인을 죽여야 할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2009)는 비뚤어졌지만 당사자에겐 가장 절실했던 모정을 주제로 전개됐다.

진짜 주제가 복수일지, 어긋난 모정에 대한 고뇌일지 모를 이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 법과 도덕에 위배될지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는, 그런 모정을 그렸다. 모든 걸 떠나 엄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무모하리만치 일방적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최근 극장가에 이 엄마가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12일 개봉된 ‘희생부활자’(곽경택 감독)와 내달 2일 개봉될 ‘부라더’(장유정 감독)다. ‘희생부활자’의 명숙(김해순)은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트럭에 채소 등을 싣고 떠돌아다니는 행상으로 남매 희정(장영남)과 진홍(김래원)을 키웠다.

▲ 영화 <희생부활자> 스틸 이미지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명숙에게 더 아픈 손가락은 진홍이었다. 왜? 아들이니까. 희정은 ‘그저 그런’ 남자를 만나 배 안 곯고 제 명대로 살면 그뿐이었지만 진홍은 달랐다. 꼭 검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결국 진홍은 검사가 됐고, 희정은 ‘그저 그런’ 남자와 결혼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명숙은 자립하는 아들의 전세금을 들고 길을 걷던 중 오토바이 강도에게 돈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멀쩡하게 부활해 집에 돌아왔다. 이른바 억울하게 죽은 뒤 부활해 진범을 찾아 복수한다는 RV(희생부활자)다. 그런데 그녀는 진홍에게 칼을 휘두른다. 그렇다면 그녀를 죽인 진범은 진홍일까?

미스터리 스릴러로 전개되는 영화는 중반 이후 엄청난 비밀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으면서 관객을 추리의 늪에 빠지게끔 만든다. 산만한 ‘떡밥’들과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구조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마지막을 향해 내달리다 보면 배경인 홍은동의 서울 한복판이면서도 왠지 종로나 강남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 지역의 오래된 서민적 정서가 넘쳐흐름을 느끼게 된다. 그건 습관처럼 오래 이어져온 모정과 다르지 않다.

▲ 영화 <희생부활자> 스틸 이미지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적 문법에 철저하게 집중하지만 정작 남기는 메시지는 모정이다. 그럼에도 남아선호사상에 집착하느라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때론 멸시되는 딸의 상대적 박탈감에 애써 집중하려는 노고를 피하는 게 옥에 티. 그 아쉬움은 ‘부라더’의 코미디가 조금이나마 보상해준다. 다만 딸이 아니라 차남이라는 설정이 아쉽긴 하지만.

석봉(마동석)과 주봉(이동휘)은 전통과 가풍과 예의범절에 깐깐하기로 소문난 안동 이 씨 가문하고도 종손 춘배의 장남과 차남으로 태어났다. 춘배의 눈엔 기골이 장대하고 순종적인 석봉은 차종손으로 충분했지만 지나치게 실리에 강한 주봉은 그렇지 못했다. 당연히 집안의 ‘넘버 원’인 춘배는 석봉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쏟았고, 상대적으로 주봉을 홀대했다.

개인주의가 강했고, 머리회전이 빠른 주봉은 어릴 때부터 이를 눈치채고 형에 대한 적개심을, 부모에 대한 반발심을 키웠다. 그래서 자신이 제일 잘 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 꽤 잘나가는 건설회사에 입사해 승승장구했지만 공교롭게도 안동 쪽 공사 프레젠테이션에서 실수를 해 해고위기에 닥친다.

▲ 영화 <부라더> 스틸 이미지

순종했으면 차종손이 돼 안동에 정착했어야 할 석봉은 엄마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반발해 서울에서 학원 강사로 일한다. 그런데 그가 정작 집중하는 일은 일확천금을 잡기 위한 유물 도굴이다. 이에 필요한 고가의 장비를 구입하느라 억대의 빚을 지고, 상환하란 독촉에 시달리고 있던 터. 이렇게 위기에 처한 형제에게 춘배의 부고가 전해진다.

안동 종택에서 만난 형제는 ‘형’이나 ‘아우’라는 호칭 없이 ‘야’로 통일돼 한시가 멀다 하고 주먹이 오간다. 그런 그들에게 종택 어딘가에 시가 100억 원 상당의 금불상이 묻혀있다는 정보가 들어옴으로써 장례식도 그들의 관계도 새로운 형국을 맞게 된다.

고리타분해 보이는 종택의 외양만큼이나 집안 어른들의 입에선 쉴 새 없이 사자성어가 흘러나오고 유교사상을 강요하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치열한 서울의 정글에서 살아온 형제에겐 공염불과 다름없는 ‘허공의 메아리’다. 그들에겐 하루하루가 전쟁이고, 매달이 돈과의 결승전이었기 때문이다.

▲ 영화 <부라더> 스틸 이미지

직계에서 유일한 혈육이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로 등을 돌리고 살아온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의 정서가 있었으니 그건 수년 전 죽은 ‘엄마’였다. 종손인 아버지는 엄마를 노예처럼 부려왔다. 종부이니 각종 관혼상제만 해도 연간 수십 번은 됐을 터. 철철이 각종 장이며 김장을 손수 담갔을 것이고 그 외의 숱한 요리와 허드렛일에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었다.

그런 엄마는 사망 전에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버지는 엄마를 병원에 한 번 안 데려갔다. 그래서 엄마 장례식 때 석봉은 대문 앞을 가로막는 친척들과 싸웠고, 그런 그들에 동조해 호통을 친 뒤 뒤돌아서는 아버지의 등에 흙더미를 던지며 의절을 선언했다. 이 가슴 찢어지는 비극 앞에서 주봉은 그냥 비겁하게 눈물만 흘릴 따름이었다. 형제에게 유일한 공통의 정서인 엄마에 대한 고통과 회한의 기억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주봉은 차남으로서의 상대적 박탈감에 형을 형이라 부르기 싫었다. 그런데 석봉은 자기보다 월등하게 잘생기고, 더 많이 똑똑한 주봉에게서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이렇게 갈등과 대결, 반목과 질시로 팽팽한 평행선을 경주하던 차안(힘든 속세)의 이들에게 피안(해탈)의 눈물로 화해하게끔 만드는 공통적 정서가 엄마에 대한 기억이 주는 통증이라니!

▲ 영화 <부라더> 스틸 이미지

아빠와 엄마는 ‘격식을 갖추지 않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각각의 호칭’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빠보다 아버지를, 어머니보다 엄마라는 호칭을 더 자주 입에 올린다. 대부분 30대가 넘으면 아버지라 바꾸지만 엄마만큼은 그대로인 경우가 흔하다. 수염이 희끗희끗한 장년이 엄마라 부르는 장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혼잣말을 해봐도 아빠는 어색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자연스럽고 정겹다.

이유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각자의 다른 역할 때문일 것이다. 원시시대부터 남자는 여자와 자식의 생존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과 싸움을 해왔다. 따라서 항상 강하거나 그런 척해야만 했고, 그게 지나쳐 권위라는 걸 어깨에 짊어지게 됐다. 부족국가에서 중앙집권적 왕권국가로 바뀌면서 남자의 지위와 그걸 지키려는 권위주의 역시 더 커졌다. 아버지는 아파도 세야 했고, 힘들고 괴로워도 강해야 했다.

▲ 영화 <부라더> 스틸 이미지

어머니는 40주 가까이 태아를 뱃속에 품고 태교를 한 뒤 영아에게 젖을 물리고 스킨쉽을 하면서 아버지와 다른 각별한 교감을 나눈다. 자아를 깨우치거나 정립하려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권위에 반발하거나 그것에 서운해할 때 어머니는 양측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아이의 반항과 남편의 박해를 모두 견뎌내야 한다. 그런 부모를 보는 아이에겐 대리복수심과 연민의 정이 각각 쌓이기 마련.

그런 태생적 설정과, 성장적 과정과, 심리적 성정을 감안해도 엄마는 각별하다. 왜? 그런 문화 속에서 다수는 엄마를 아버지만큼 무서워한 적 없고 어려워한 적 없기에 지나치게 친밀하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무심하게 지나친 적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범죄도시’만큼 무시무시하진 않지만 여전히 위압적인 마동석과, 얄미우리만치 이기적인 이동휘가 “엄마, 엄마”라며 굵은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장면은 그 어느 사모곡보다 절심함이 그지없게 만든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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