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이슈&피플] 요즘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범죄도시’(강윤성 감독)는 마동석에서 시작돼 윤계상으로 매조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깡패’보다 더 위압적인 마동석의 캐릭터가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한편 윤계상의 첫 악역도전이 신선한 충격과 놀라운 재미를 안겨준다. 2004년 '발레교습소'로 영화를 시작한 윤계상의 연기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한 평가가 줄을 잇는다. 지금까지 멜로물의 단골주인공이었던 윤계상의 이런 변신은 이미 오래전 굳어진 하나의 패턴이다.

국내의 경우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명실상부한 정상급배우라면 작품의 제일 첫 번째 자리에 오르는 주역을 맡는 게 정석이었다.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 아주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주조연의 최악질 캐릭터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그 이유는 ‘원 톱 주연’이란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수입보다 더 큰 CF라는 부수입이 끊길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상업광고에서 중요한 건 제품의 우수성을 널리, 그리고 이미지를 최상이라고 알리는 기능이다. 그런데 살인마 역할로 대중에게 미운털이 박힌 배우가 상품의 광고를 맡는다면 신뢰도가 떨어지고 비호감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될 가능성이 높으니 광고주가 손을 잡을 이유가 희박하다. 배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광고모델 기용이 드문 개그맨임에도 웬만한 주연급 배우 뺨칠 만큼 유재석이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인기도 인기지만 예능을 통해 쌓은 착한 이미지 덕이다.

▲ 영화 <베테랑> 스틸 이미지

그런데 요즘 누가 뭐래도 멜로 액션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정의로운 주인공에 마땅한 정상급 배우들이 2인자 악역을 적극적으로 맡는 게 유행이다. 윤계상을 비롯해 ‘살인자의 기억법’의 김남길, ‘브이아이피’의 이종석, ‘베테랑’의 유아인 등이다. 특히 이종석과 유아인은 가장 ‘뜨거운’ 청춘스타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관상’의 이정재, ‘신세계’의 황정민,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하정우 등은 결코 좋은 일을 하거나 선한 성품이 아니지만 주인공의 주적으로서 야비하고 잔인하며 남의 뒤통수를 치는 진짜 빌런은 아니다. ‘공조’의 김주혁, ‘마스터’의 이병헌, ‘전우치’의 김윤석, ‘추격자’의 하정우, ‘군도: 민란의 시대’의 강동원 등 극 중 ‘넘버 2’로서 ‘넘버 1’과 끝까지 싸우는 게 진정한 주인공 빌런이다.

그렇다면 생긴 대로 멜로의 주인공이나, 액션 히어로 역을 맡아 여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본업’에 충실하기에도 바쁜 이종석이나 유아인 같은 청춘스타들이 왜 굳이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악역 주인공에 나서길 마다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기력의 속성 업그레이드가 답이다.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TV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성장한 배우라면 누구나 스크린 안착을 꿈꾼다. 조각 같은 얼굴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동건은 안방극장에서 초특급 대우를 받던 1999년 안성기 박중훈 주연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감독)의 아주 하찮은 배역에 자청해 출연했다.

감독과 안성기 박중훈 등의 베테랑들에게 영화와 영화에 적합한 연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친구’로 비로소 영화배우로 성공한 이후 수억 원대의 개런티를 받게 된 그가 ‘단돈’ 5000만 원에 김기덕의 ‘해안선’에 출연한 이유 역시 더욱더 성장하기 위함이었다. ‘친구’에서 그가 맡은 동수는 준석(유오성)과 대척점에서 선 인물로 굳이 구분하자면 살인교사자는 준석이었지만 빌런은 동수였다.

어느 배역인들 쉬울까마는 톱스타의 경우 주조연급 악역을 선뜻 잡기란 아무래도 께름칙하기 마련. 여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지고지순한 역할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다수의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적 역할로 인기도 높이고 좋은 이미지도 굳히는 게 유리한 건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역할로 정상에 오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내려가는 게 순서고 가능하면 좀 길게 그 자리를 지키고 싶다.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오랫동안 영화를 고집하던 장동건이 2012년 SBS ‘신사의 품격’으로 안방극장에 되돌아온 이유는 결혼해 아이의 아버지가 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 이상 청춘스타가 아니므로 내용만 괜찮다면 드라마라고 기피할 이유가 없고, 더 나아가 영화를 보기 힘든 자식에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보여줄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악역은 그렇게 정상에 오래 머무른 톱스타가 나이를 먹고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으로선 아주 매력적인 타깃이다. 아직 연기파라 부르기 쉽지 않은 청춘스타에겐 연기력 성장의 속성과정이란 게 가장 큰 메리트다. 영웅이나 ‘착한 남자’는 사실 캐릭터가 거기서 거기다. 고작해야 ‘아이언맨’의 바람둥이 토니 정도지만 그런 설정은 여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동시에 빨아들이는 묘한 매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지고지순형’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잔인한 빌런은 임팩트가 확실하게 강하다. 감독의 의도를 십분 표현해낼 경우 스크린 밖으로 뿜어내는 아우라는 주인공의 그것보다 더 눈부시다. ‘브이아이피’에서 장동건 김명민 박희순 등 베테랑들이 열연을 펼쳤지만 남는 배우는 역시 이종석이었다. 이종석의 영화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저조한 흥행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화제를 낳은 적은 없었다.

▲ 영화 <대장 김창수> 스틸 이미지

송승헌은 최근 개봉된 ‘대장 김창수’에서 역시 빌런의 캐릭터를 맡았다. 타이틀롤을 맡은 조진웅에 비교하면 그는 확실한 청춘스타지만 악역의 주조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영화배우로서의 터닝포인트가 절실했던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다.

청춘스타는 대부분 경력이 짧기 마련. 외모와 작품 속 이미지로 이성팬들이 앞장선 인기를 만들어냈지만 아직 ‘연기파’는 아니다. 처음에야 인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벅찼겠지만 작품수가 늘어날수록 연기력에 대한 갈증이 점점 더 심해지기 마련. 그런 답답한 장벽에 부딪쳤을 때 악역변신은 훌륭한 돌파구이자 탁월한 비상구다.

당연히 감독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감독이 훌륭할수록 악역에 괴롭힘을 당하는 주인공 역시 연기파이기 마련. 그런 환경은 지금까지 또래의 배우들과 말랑말랑한 멜로나, 아주 흔한 히어로물의 상업적 구조 속에서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연기를 해온 것과는 판이할 것이다. 영화공부와 연기력성장의 속성과외다. 게다가 관객들의 수준이 일취월장해 광고주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도 악역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줬다. 예전에야 일일드라마의 못된 며느리 역할을 한 여배우가 실생활에서도 욕을 먹었지만 지금은 21세기다.

▲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 이미지

이런 변화가 가능하게 된 배경엔 패러다임과 인식의 변화도 한몫했다. 우리 영화는 할리우드나 유럽의 영화를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20세기 말 슈퍼스타들이 미미한 비중이지만 극의 흐름에 매우 중요한 카메오로 출연하는 사례를 보면서 반드시 주인공이 정답인 건 아니라는 영화적 장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공식’이란 게 파괴된 것이다. 관객 역시 그런 ‘깜짝 출연’ 혹은 ‘깜짝 변신’을 재미있게 즐길 줄 아는 관람문화에 익숙해졌다.

물론 해당 배우들에겐 후유증이 꽤 크고 또 길게 간다는 부담이 있다.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촬영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뒤 촬영 때 진짜 연쇄살인마가 된 듯 말투와 행동은 물론 생각까지 몰두하는 완벽에 가까운 배우일수록 더 심하다. 연기를 잘 할수록 관객이 배우와 캐릭터를 동일시하는 착시현상도 강한 게 당연하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쌓아놓고 보는 배우일수록 한 번 맡은 캐릭터와 비슷하거나 같은 직업의 출연제의는 일단 거부하고 보는 게 정석이긴 하다. 굳은 선입견은 ‘팔색조’ ‘변신’ ‘스펙트럼’이란 수식어를 다는 게 훈장을 받는 명예인 배우에겐 결정적인 몰입의 훼방꾼이기 때문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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