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채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향년 45, 46살이란 한창때에 같은 날(10월 30일) 세상을 떠난 김주혁과 도민호(육각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공허한 구멍 하나를 크게 뚫어놓았다. 사랑하는 이를 저세상으로 보낼 때마다 사람들이 공통으로 생각하는 건 ‘과연 삶이란 뭘까’ 혹은 ‘죽음이란 뭘까’란 철학적 현학적 혹은 아주 현실적인 명제일 것이다.

오는 9일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담은 영화 ‘채비’(조영준 감독)가 개봉된다. 영화는 뇌종양으로 길어야 1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애순(고두심)과 그의 30살이지만 7살의 지능에 멈춘 정신지체 아들 인규(김성균)의 ‘죽어야만 하는 엄마’와 ‘살아야만 하는 아들’의 가슴 절절한 얘기다. 두 유명인의 죽음과 맞물린 시기라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을 던질 것으로 보인다.

노상매점으로 근근이 아들과 함께 사는 애순의 꿈은 소박하다. 아들의 장애가 완치되는 것도,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욕심을 부려 예수에게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걸 아는 그녀는 자신이 떠난 뒤 아들이 혼자서 제 밥그릇 챙기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며, 평범하게 제 명대로 살다 죽길 간절히 원할 따름이다.

▲ 영화 <채비> 스틸 이미지

영화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곧 죽을 사람을 ‘떠나보내는 준비’, 곧 죽을 걸 아는 사람이 살아야만 하는 사랑하는 이의 자립을 가르쳐주는 ‘떠날 준비’를 그린다. 영화의 외형은 절절한 모정과 비록 정신지체장애인이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한 ‘소년’의 속성성장기와 이를 통한 타자에 대한 배려다. 메시지는 삶과 죽음에 대해 만만치 않은 심도를 보인다.

물리학과 철학을 결합한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인터스텔라’(크리스토퍼 놀란)는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대입하면 ‘채비’는 자연스레 이들과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인터스텔라’. 황폐화된 지구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인류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기 위해 우주로 떠난 쿠퍼는 가지 말라고 애원하던 사랑하는 어린 딸 머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아주 긴 시간을 우주에서 헤맨다.

그럼에도 결국 부녀는 재회한다. 쿠퍼에게 몇 년에 불과했던 시간은 소녀였던 머피가 목숨이 경각에 달한 노파가 됐을 만큼 지구에선 아주 긴 세월이었다. 머피는 자신의 임종을 지키려는 쿠퍼에게 “아버지가 자식의 죽음을 보는 게 아니다”라며 자리를 비워줄 것을 요청한다. 이 얼마나 사려 깊은 채비고 감동적인 이별인가?

▲ 영화 <채비> 스틸 이미지

죽음에 대한 질문에 공자는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라고 답했다. 철학에 대한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했다. 플라톤은 “죽음은 영혼이 신체로부터 불사의 세계로 옮겨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독교는 ‘죽음은 신체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일’이라며 끝이 아닌 자유와 구원이라 바라본다.

하이데거는 앞서 살다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종교를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실존주의적 철학으로 묻는다. 그는 시간을 존재(자)의 고유한 영역으로 규정하는 한편 그 시간 안의 인간은 주변세계의 사물과 구분해 세계내부의 현존재, 즉 반드시 죽는, 혹은 ‘죽어감’을 향해 사는 존재론적 시각으로 본 것.

애순과 인규는 모두 피투된(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內)-존재’의 관점에서 ‘터있음’(존재사유)의 개시성(열어 밝혀짐)을 추구하는 존재자로 봐 피투된 기투(이데아 추구의 자율성)를 추구했다. 그렇게 피투된 애순은 인규를 기투적 존재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집과 직장을 오가는 버스노선과 환승요령을 가르치고 쌀과 물의 비율도 메모해준다.

▲ 영화 <채비> 스틸 이미지

사실 인규는 은근히 말썽을 피운다.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자신을 저버렸다고 피해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도 사회에 만연한 소수자에 대한 편견, 즉 불편하고 까칠한 왜곡된 시각에 대한 메타포이자 비판이다. 인규는 저희들끼리 ‘바보’란 일상적(?)인 단어를 주고받는 청소년들의 대화가 자신에 대한 조롱이라고 오해해 그들을 폭행한다.

그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왜곡된 시선이란 미필적 고의에 의해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는 장애인에 대한 부족한 배려는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는 알레고리다. 정부는 한때 장애우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장려했지만 이내 장애인으로 되돌렸다. 장애우로 바꾼 발상 자체에 편견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규는 어릴 때부터 세상을 망원경으로 봐왔다. 그렇게 봐야 할 만큼 사회는, 주변사람들은 그로부터 멀리 존재했기 때문이다. 차마 눈을 마주하기 두려울 만큼 타인의 시선이 지나치게 따가웠거나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인규가 짝사랑하는 여인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행위조차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변태’로 왜곡되는 시퀀스가 바로 그 비유다.

▲ 영화 <채비> 스틸 이미지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애순은 불경한 사람일 수도 있다. 교회에 나오라는 목사에게 그녀는 “개뿔”이라며 ‘종교가 밥 먹여 주냐’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시한부인생을 인지한 후에는 스스로 교회에 앉아 예수에게 생명연장을 애원한다. 이 이율배반적인 행동은 모순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애틋한 모성애의 채비를 강조하고자 함이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태어난 게 부조리라면 죽는 것도 부조리”라고 말했다. 그만큼 사람들은 죽음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또 어떻게든 피하려 한다. 그럼에도 죽는다. 오래 살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삶 자체가 부조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애순은 다르다. 그녀가 살고자 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홀로 남겨질 인규란 미완성인격체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 영화 <채비> 스틸 이미지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곧 삶의 완성’이라고 했다. 애순은 1년 내에 자신의 삶이 완성된다는 ‘죽어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죽어감’의 존재인 인규의 그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았고, 엄마(보호자)로서 그걸 지켜줘야 할 절실한 책임감에 방법을 찾기 위해 이뤄질 수 없는 자신의 생명연장을 갈구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그렇게 많은 생각을 유도하는데 그게 자극적이거나 억지스럽거나 과장되지 않다는 미덕을 지녔다. 애순과 인규의 에피소드, 그들의 주변사람들의 캐릭터 등은 영화적이기보다는 일상적이어서 친숙하고 살갑다. 갈등구조를 구축하는 캐릭터인 인규의 누나 문경(유선)조차도 과할 정도로 ‘밉상’의 규정속도를 준수한다. ‘집으로’를 연상케 하는 ‘착한’ 영화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서울신문, 미디어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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